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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오랜만의 '가출'이 남긴 것들

중앙일보 2017.11.01 01:03 경제 8면 지면보기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사진 Freepik]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사진 Freepik]

 
불현듯 옷 몇 점 챙겨 차에 싣고 입던 차림 그대로 일단 달렸다. ‘훌쩍 떠나고 싶다’고 치미는 마음이 일상에 눌려 꺼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말도 없이 집을 나서는 순간 막막해졌다. 이왕이면 울창한 숲속 풀벌레 소리가 멀리 떠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곳, 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 속 별이 쏟아지는 곳으로 어서 나를 데려가야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달아나고 싶었다.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고혜련의 내 사랑 웬수(17)
추석 다음날 무작정 짐 챙겨 산사로 떠나
가족의 소중함, 익숙한 것의 편안함 느껴
남자 식구에게도 홀로 떠나는 자유 줄터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골 정취가 더 살아있는 샛길을 택해 몇 시간 달리다 어느 깊숙한 산사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추석 다음 날인데도 거긴 이미 코스모스와 들국화, 꽃무릇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하녀 같은 일상’에서 해방된 기분이 솟구쳤다.
 
지축을 흔드는 듯 육중한 타종 소리, 스님들의 예불 소리를 듣는 순간 소란했던 머릿속 뇌파에 변화가 일고 있음이 감지됐다. 진정과 치유의 새로운 파동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거야’ 하면서 나를 짓누르던 일상으로부터 온몸과 마음이 벗어나길 얼마나 바라왔던가 새삼 느끼게 됐다.  
 
그렇게 지쳐있을 때 낯선 곳으로 길을 떠나는 것, 그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직장과 부엌을 오가며 저 스스로에 족쇄를 채우고 정신없이 일로매진했던 내게 온전한 비움의 시간을 준 게 얼마 만인가. 떠나고 싶다를 입버릇처럼 되뇌면서 제풀에 주저앉고 말았던 내게 ‘가출’을 감행하게 한 것은 가을의 힘이다.  
 
 
가을의 힘 
 
 
[제주=연합뉴스] 제주 한라산 고지대가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변해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제주=연합뉴스] 제주 한라산 고지대가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변해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아스라이 드높은 하늘, 소슬한 바람, 말간 햇살 속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길래 사람 마음을 이리 흔드나 모르겠다. 이 나이에 한갓 배부른 투정으로 치부될까 억눌렀던 감상이 말갛게 씻기어져 투명하게 속살을 드러내니 역시 가을은 가을인가보다.  
 
그곳엔 나처럼 혼자 가방을 들고 불심에 깃들기 위해 찾아든 여성이 적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선방을 하나씩 배정받은 그들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나에게 익명의 힘을 빌어 달빛아래 쏟아놓은 사연들은 애잔하고 아프고 쓸쓸했다. 추석명절도 가족 없이 산사에서 피해 지내야 했던 그들의 기막힌 사연, 낯선 공간에서 느닷없이 조우한 인연은 다시 만날 기회는 없겠지만 수시로 내 고민이 얼마나 사치한 것임을 말해 줄 것이다. ‘당신이 건강하고 그런 당신을 필요로 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를거야’ 라고. 그걸로도 그날 ‘가출’은 성공적이었다.
 
 
남자 식구의 무심함 
 
 
[원주=연합뉴스] 강원 원주시 치악산국립공원 구룡사 언덕에 노란 은행잎이 가득 떨어져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원주=연합뉴스] 강원 원주시 치악산국립공원 구룡사 언덕에 노란 은행잎이 가득 떨어져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불현 듯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살면서 내 앞이 온통 벽으로 막혀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더욱 그러하다. 남자 식구의 무심함이 분노로 이어질 때도 말이다.  
 
길들여진 것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여행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생기를 잃고 지친 익숙한 것들에 감사하며 새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이다. 가없는 자연 속에서 창조주의 위대함과 미미한 내 존재를 깨달아 겸허해 지는 것, 희로애락을 함께 한 가족의 소중함과 익숙한 것들의 푸근·편안함을 확인하며 나의 현재에 자족하기 위해서라도 떠남은 좋은 것이리라. 탈출 계획은 인생이라는 압력밥솥에서 김을 빼 폭발을 막는 상상의 장치로 이미 계획만으로도 풍성하고 자유로운 일탈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멀리 떨어져 객관화된 시각으로 내 일상을 조망케 하는 여행은 나의 고민이 살아있음의 증거이며 마음먹기에 따라 전혀 다른 경지로 치환될 수 있다는 것, 상처를 받는 일조차 대접받길 원하는 오만함의 소치였음을 알게 한다.
 
내가 여행에서 하루속히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족이 그리워지고 그들이 붙박이인 양 늘 거기 그렇게 대기하고 있음에 감사함도 저절로 솟구칠 것이다. 이런 깨우침이 잊혀질 때쯤 우린 또 길 위에 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 집안에서 고스란히 늙어가는 남자 식구에게도 가끔은 혼자 떠나는 자유를 허하는 아내, 멋지지 아니한가.
 
고혜련 (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hrko321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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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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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고혜련 (주)제이커뮤니케이션대표 필진

[고혜련의 내 사랑 웬수] 기자로 은퇴한 출판인. 결혼이 흔들리고 있다. 인륜지대사의 필수과목에서 요즘 들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과목으로 주저앉았다. 결혼 한 사람들은 ‘졸혼(卒婚)’과 ‘황혼 이혼’도 서슴지 않는다. 결혼은 과연 쓸 만한가, 아니면 애당초 폐기해야 할 최악의 방편인가? 한 세상 울고 웃으며 결혼의 명줄을 힘들게 지켜가는 선험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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