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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이 나를 말하는 시대...여유 지향 사회의 풍경

중앙일보 2017.10.31 09:52
 장소가 중요해? 그래, 중요해! 
 
 장소가 중요한 시대다. 과거에 내가 사는 것이 나를 말해주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내가 있는 곳이 나를 말해주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누구와' '언제' '무엇을' 했다는 것보다 '어디서' 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로 부상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핫플레이스는 나의 감성을 대변하는 장소
인증샷도 '접시'에서 '풍경'으로 변화
"여유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욕망 더 커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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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빅데이터 분석업체인 다음소프트 연구원들이 2015년부터 2017년 6월까지 소셜미디어에 가장 많이 나온 행동 서술어를 분석한 결과, '오고, 가고, 먹고, 노는 행위어는 증가했지만 생각하고 일하고 배우는 서술어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오고 가고' '먹고 쉬는' 서술어의 연관어로는 장소 지칭어가 가장 많이 나왔다. 다음소프트 연구원들은 2018년을 맞아 우리가 음미해야 할 라이프 스타일 변화를 분석해 『2018 트렌드 노트』(김정구·박현영·백경혜·염한결·정유라 지음, 북스톤)를 최근 펴냈다. 뜨는 장소를 10개 범주로 묶어 시대 감성의 흐름을 짚어본 책이다. 
 
 책에 따르면, 새로운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올린 글이 매년 1.2배씩 증가했다. 구체적인 핫플레이스는 바뀌어도, 핫플레이스를 찾는 행위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저자들은 "과거에는 '잇 아이템'이라는 것이 있어 물건을 소유하는 게 중요했다면, 점차 시간을 보내는 장소 그 자체가 중요해지고 있다"며 "장소야말로 시대 감성을 읽기에 최적화된 키워드"라고 말했다. 
 
 '집'이라는 곳
덴마크 스타일로 꾸며진 거실. [사진 보컨셉]

덴마크 스타일로 꾸며진 거실. [사진 보컨셉]

 우선, 우리가 사는 집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집은 생존을 위해 사는(live) 공간에서, 부동산적 가치를 사는(buy) 공간으로 확장됐다가, 최근에는 다시 '사는'(live) 공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 저자들은 "집 자체가 욕망의 핵심에 서게 된 것"이라고 풀이한다.  
 
 숲세권? 또는 스세권? 
거주자의 취향에 따라 숲세권은 삶의 질을 좌우하기도 한다.

거주자의 취향에 따라 숲세권은 삶의 질을 좌우하기도 한다.

 내가 사는 동네의 이미지도 중요해졌다. 집 안을 벗어나 내가 사는 동네나 아파트 단지에 대한 소속감이 확장되는 추세다. 집과 동네를 고르는 기준도 과거 '역세권'이 중요했다면, 최근에는 그 기준이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숲세권'(집근처에 공원이 산 같은 자연 녹지가 있는 곳), '수세권'(강이나 호수, 바다 등을 바라볼 수 있는 곳), '스세권'(근처에 스타벅스가 있는 곳), '몰세권'(대형 쇼핑몰 부근)등이다. 
 '집근처' 역시 또 다른 경험의 공간이 됐다. 집근처에서 궁금한 가게를 발견하고, 의외로 괜찮은 곳을 찾으면 '발굴잼'(발굴하는 재미)을 경험하는 것이다. 
 
 편의점, 신상품을 체험하는 장소 
 편의점이 뜬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요즘 사람들의 '유목민적인 삶'과 맞물린 장소로 다시 주목할 만하다. 
 편의점은 남성들이 좋아하는 채널이다. 여성들은 커피, 과자, 음료 등의 간식을 구매하기 위해 편의점에 들르는 반면, 남성들은 주로 도시락, 라면, 삼각김밥 등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의점을 찾는다. 
 편의점은 신상품을 체험하는 장소다. "우리 시대의 선은 새로움이다. 새로운 그 자체가 가치다'." 
 
 휴식이 중요해진 시대, 집의 반대말은 호텔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 [중앙포토]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 [중앙포토]

 온라인 상에서 언급량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장소가 바로 '호텔'이다. 낯선 타국의 호텔만이 아니라 국내 호텔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이제 호텔은 이국적인 감성을 찾아 떠나는 장소가 아니라, "출퇴근과 설거지, 청소 걱정이 없는" 장소다. 호텔 언급량은 휴가철인 여름에만 집중되지 않고 연중 고른 언급량을 나타내고 있다. 호텔과 함께 언급되는 서술어도 '먹다' '찍다' '편하다'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휴식의 의미가 변했다. '호텔'에서의 하루를 자신에게 선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롯데호텔 제주]

휴식의 의미가 변했다. '호텔'에서의 하루를 자신에게 선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롯데호텔 제주]

 집에서 시켜 먹는 '치맥'이나 공원 산책은 더 이상 충분한 휴식이 아니다. 휴식시간은 더 길어져야 하고, 그 휴식 경험은 일상과 달라야 한다. "주말에 IPTV로 '프로듀스 101'을 정주행하던 장소가 내 집 소파에서 호텔 침대로 옮겨가고 있다." 이들에게 '아무것도 안하며 보내는' 호텔에서의 시간은 "나 수고했어"라고 말해주는 인센티브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휴식과 재미의 가치가 변화하고, 호텔을 보다 친근하고 일상적인 장소로 느끼게 될 만큼 라이프스타일이 변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호텔이 '휴식'에 대한 가치관이 크게 변화했음을 보여주고, "이미지 시대에 '나'를 대변하는 중요한 메타포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은 게으름이나 무능함이 아니라 역으로 유능함을 증명하는 셈이다. 휴식은 더 이상 노동을 위한 재충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핫플레이스, 내 감성과 안목을 인증하는 도구 
 '#분위기깡패' '#비주얼깡패'…. 요즘 '뜬다'는 카페를 가리킬 때 쓰이는 수식어다. 저자들은 "요즘 핫플레이스들은 그 공간을 사랑하는 주인이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취향 전시장'과 같다"고 말한다. 찻잔 하나, 티스푼 하나, 조명 하나가 그 곳을 만든 사람과 찾는 사람들의 '감성'을 대변한다. 핫플레이스를 찾아 인증샷을 찍는다는 것은 나의 취향과 안목을 인증한다는 의미다. 
 
 '여유 지향 사회', 우리의 초상   
 결국 저자들은 빅데이터가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풍경은 '여유 지향 사회'라고 입을 모은다. "2018년에 우리가 바라는 이미지는 근명 성실하게 땀 흘리는 개미보다 눈을 감고 악기를 연주하는 베짱이 가깝다"는 것이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에 '오늘'을 저당잡히며 사는 대신 여유로움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여유는 여행 혹은 주말에 읽고, 먹고, 찍는 행위를 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즐기며' '좋은' '추억'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진정한 여유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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