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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갈이' 교수에게 30대 판사가 '후버 교수' 언급한 이유

중앙일보 2017.10.31 06:00
 ‘독일 뮌헨의 구시가 북쪽에서부터 시작되는 루드비히 거리는 그곳으로부터 북쪽을 향해 뮌헨 시내를 가로지른다. 오데온 광장에서 시작되는 루드비히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서쪽으로 뮌헨대학교 본관이, 동쪽으로 뮌헨대학교 법대 건물이 나오고, 두 건물 사이로는 원형의 잔디광장이 있는데, 그 광장 가운데를 루드비히 거리가 관통한다…’
마치 뮌헨대학교의 전경을 눈으로 보는 듯 세밀히 묘사한 이 문장은 기행문이 아니다. 엄중하게 유죄를 선고한 판결문의 일부다. 판결문의 ‘저자’는 교수들보다 한참 어린 의정부지방법원 형사1단독 정성민(38·사법연수원 36기) 판사다. 지난해 6월 다른 사람이 쓴 책을 표지만 바꿔 자신의 저서인 것처럼 출간한 이른바 ‘표지갈이’ 사건으로 기소된 대학교수들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하면서 양형 이유를 설명하는 글의 첫머리 부분이다.
정 판사가 뮌헨대학교 전경을 묘사한 이유는 이 대학에 있는 ‘숄 남매 광장’과 ‘후버 교수 광장’에 얽힌 사연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정 판사가 판결문에 기록한 설명에 따르면 뮌헨대 학생이었던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 그들의 교수였던 쿠르트 후버는 나치즘(국가사회주의)에 저항한 비밀조직인 ‘백장미단’의 일원이었다.

다른 사람 저서 표지만 바꿔 '공저자'로 표시
대학에 버젓이 자신의 연구업적 자료로 제출
정성민 판사, 판결문에 독일 '국민 교수' 언급
법원은 저작권법 위반 등 1500만원 벌금형

 
숄 남매는 1942년부터 나치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고, 후버 교수는 물심양면으로 이들을 후원했다. 하지만 이듬해 백장미단은 발각됐고 숄 남매와 후버 교수를 비롯한 전원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뮌헨대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대학의 중심지 광장을 이들의 이름을 붙였다. 후버 교수는 독일 국민의 기억 속에 '존경받는 스승의 표상'으로 각인됐다.
 
정 판사는 판결문에서 “대학교수는많은 사람들이 선망하고 존경하는 직업이다. 대학이 지성의 상징이듯이,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는 지성을 낳는 자이자 사표이다”라며 “그런데 그런 교수가 자신이 쓰지도 않은 책을 자신이 쓴 것처럼 저자로 표시해 책을 출간했고, 그 책을 자신의 연구업적으로 대학에 보고하기까지 했다. 피고인들(교수)의 행위는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으며,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꾸짖었다.
 
당시 의정부지검은 표지갈이로 남의 저서를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킨 대학 교수 179명과 이를 묵인한 출판사 임직원 5명을 무더기로 적발해 기소했다. 교수들은 표지갈이도 모자라 이를 연구업적으로 학교에 제출해 교원업적평가에 반영토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들에게 저작권법 위반과 위계에 의한 업무(공무)집행방해 혐의를 적용했다.
백장미 단원들, 왼쪽부터 한스 숄, 조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쿠르드 후버 뮌헨대 교수 [중앙포토]

백장미 단원들, 왼쪽부터 한스 숄, 조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쿠르드 후버 뮌헨대 교수 [중앙포토]

정 판사가 맡은 사건의 피고인 교수는 경상북도의 한 대학에 재직 중인 곽모(42)씨와 충청도의 국립대 교수 김모(57)씨 등 3명이었다. 정 판사가 쓴 판결문에는 교수로서 명예를 저버린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원망, 유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는 괴로움이 묻어났다. 정 판사는 양형 결정에 앞서 “피고인들에 대한 양형에 있어 어떤 형을 선택할 것인지가 가장 고민됐다. 징역형을 선택한다면 설령 그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해도 피고인들의 신분 등에 필연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위계에 의한 업무(공무)집행방해 혐의는 유죄로 인정하면서 저작권법 위반은 무죄로 판단했다. 독일과 일본의 저작권법 관련 문헌을 폭넓게 참고한 점도 판결의 근거로 명시했다. 정 판사는 곽 교수 등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판사의 진심이 교수들에게 전달되진 않은 듯하다. 2명의 교수는 항소를 포기했지만 곽 교수는 “교원업적평가가 방해되었다 해도 이는 학교 측의 불충분한 심사 때문이며, 1심의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오히려 1심의 ‘관대한 판결’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1심 법원이 무죄로 판단한 저작권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라고 판단했다. 의정부지법 형사1부(부장 성지호)는 원심을 파기하고 곽 교수 등에게 벌금 1500만원을 선고했다.
교수들의 '표지갈이' 방법 이미지

교수들의 '표지갈이' 방법 이미지

항소심 재판부가 쓴 판결문도 윤리를 저버린 교수들에 대한 꾸짖음을 잊지 않았다. 재판부가 판결문에 쓴 양형 이유는 이렇다.
 

“최고 지성인이자 교육자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대학교수의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사익을 추구하려는 탐욕에 빠져, 자신이 쓰지도 않은 책을 마치 자신이 쓴 것처럼 공저자로 표시해 책을 출간하는 것을 승낙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교원업적평가 자료로 제출하기까지 한 점에 비춰볼 때 엄벌에 처함이 마땅하다.”

 
이들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도 1, 2심과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곽 교수 등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저작자가 아닌 자를 저작자로 표시해 공표한 이상 범죄는 성립하고, 사회 통념에 비춰 사회 일반의 신뢰가 손상되지 않는다고 인정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실제 저작자의 동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불법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또 “교원재계약을 위한 기준 점수를 월등히 초과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교원업적평가 결과를 왜곡한 이상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고 설명했다.
 
곽 교수 등과 같은 혐의로 다른 재판에 넘겨졌던 교수들에게도 대법원은 같은 이유로 벌금 1000만~1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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