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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살아있는 권력에 내시경을 꽂아라!”

중앙일보 2017.10.31 02:15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도청’ 특종으로 1974년 미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리처드 닉슨은 평소 언론을 기피했다. 그런 그가 퇴임한 지 9년 뒤 대통령 역사학자 프랭크 개넌과 작정하고 인터뷰를 했다. 무려 38시간. 내용은 의외였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이렇게 돌이켰다. “그들(언론)은 큰 총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탄약을 건네주었고, 그들은 우리에게 바로 총을 발사했다. 언론엔 현 정부를, 현 대통령을 현미경으로 감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들 한다. 난 사실 현미경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현미경 정도가 아니라) 내시경까지 들이댔다.” ‘살아 있는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해 결국 자신을 쫓아낸 언론에 화를 내긴커녕 경의를 표한 것이다. 9년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일 게다.
 

공영방송 장악 달라진 게 뭐가 있나
언론의 ‘현 권력’ 감시가 곧 적폐 방지

버락 오바마가 올 초 퇴임을 이틀 앞두고 마지막 기자회견장에서 내뱉은 말도 그랬다. “기자는 항상 비판적인 태도로 현직 대통령에게 곤란한 질문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막강 권력의 대통령을 칭찬하기보다 비판적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 게 기자의 역할이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여러분의 책임이다. 이 건물(백악관 브리핑실)에 여러분들이 있어 우리를 정직하게 만들었고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었다. 여러분들은 아첨꾼이 아닌 회의론자여야 한다.”
 
닉슨과 오바마의 말은 돌려보면 ‘적폐 방지론’이기도 하다. 지금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언론의 철저한 감시만이 4년, 8년 뒤 정권이 바뀌어도 적폐를 막을 수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의 여러 현상은 5년, 10년 혹은 더 나중에 정권교체가 이뤄진 뒤 어떤 평가를 받을까. 최근 국정원 개혁위원회는 “MB 정부 당시(2009년 5월) 국정원이 ‘국정원의 수사개입 의혹’ 비보도를 요청하며 KBS 보도국장(현 고대영 사장)에게 200만원을 건넸다”고 발표했다. 난 당장 ‘노무현 논두렁 시계’가 떠올랐다. 노무현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고가 시계를 받았고, 수사 개시 후 이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내용(의혹)을 국정원이 흘려 망신을 줬다는 건이다.
 
후자가 이명박 국정원의 노무현 망신주기였다면 전자는 문재인 국정원의 고대영 망신주기다. 복사판이다. 손봐야 할 전직 대통령을 논두렁 시계로 엮는 것이나, 말 안 듣는 공영방송 KBS 사장을 200만원으로 엮는 것이나 둘 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MB 정권 초 KBS·MBC 사장을 좌빨로 몰아 평정했던 것이나, 정권이 바뀐 지금 KBS·MBC 사장을 적폐로 몰아 쫓아내려는 것이나 뭐 하나 달라진 게 없다. 촛불이 갈망했던 ‘정치교체’는 없이 ‘정권교체’만 있었던 게다. 이런 도돌이표 행진이 계속되는 한 공영방송은 다음 정권교체 시에 또 5년 전, 10년 전 비디오를 틀 수밖에 없다.
 
백번 양보해 정치야 그렇다 치자. 우리 언론은 어떤가. 과거의 폐단을 해결해야 보다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절대적 당위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살아 있는 권력에 의한 죽은 권력 물어뜯기에 덩달아 춤추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를 소홀히 한다면 그야말로 본말전도다. 사실 그래서 우리 정치가 이 모양이 된 측면도 있다. 언론의 본질은 과거 캐기가 아닌 현재 감시다.
 
촛불 1년을 맞아 파업 중인 KBS 기자들이 KBS 사장 집 앞에서 촛불시위를 하며 사장 퇴진을 외쳤다 한다. 하루빨리 사장 집 아닌 청와대 앞에서, 초가 아닌 눈에 불을 켜고 ‘지금의 권력’을 감시하는 본연의 기자로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 닉슨과 오바마가 말했듯 권력에 ‘내시경’을 꽂을 각오로 말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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