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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비용’ 대신 ‘비용의 합리화’…新 소비 트렌드 ‘OO비용’

중앙일보 2017.10.27 11:39
직장인 정모(28)씨는 퇴근 후 수영을 하면서 일상의 행복을 찾는다. 하지만 잦은 야근 탓에 종종 수영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는 최근 늦게 퇴근해 수영장에 갈 수 없는 날에는 택시를 이용해 귀가하고 있다. 정씨는 “매번 지출하는 택시 요금이 아깝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으려 한다”고 말했다.
 

홧김 충동구매로 발생하는 ‘시발비용’
비용을 합리화 하는 새로운 소비 패턴
"미래를 내다보는 소비와는 거리 멀어"

오월암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트위터 이용자가 지난해 11월에 처음 쓴 뒤로 유행하고 있는 신조어 '시발비용'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뜻한다. [트위터 캡처]

오월암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트위터 이용자가 지난해 11월에 처음 쓴 뒤로 유행하고 있는 신조어 '시발비용'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뜻한다. [트위터 캡처]

정씨가 지출한 택시 요금은 그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비용이다. 지난해 11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서 한 이용자는 이 같은 비용을 ‘시발비용’으로 정의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또는 스트레스를 받아 홧김에 지출한 비용을 일컫는 신조어다. 욕을 순화한 이 표현은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지난 3월 기준 인스타그램에서 시발비용을 태그한 게시물은 3000여 건이었는데, 27일 현재는 1만2000여 건으로 4배가 됐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지난 6월 수도권에 사는 20대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충동적 소비 경험에 대해 조사한 결과 “최근 6개월 내 스트레스 해소 및 기분 전환을 위한 순간적 소비를 해 본 적이 있다”는 응답은 전체의 63%였다. “충동소비가 실제로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응답은 52%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응답(24%)의 두 배 이상이었다. 지난 2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회원 91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홧김에 스트레스로 낭비한 경험이 있다”고 밝힌 응답자는 전체의 80%에 이르렀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20대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충동적 소비 경험 여부 및 인식. [자료 대학내일20대연구소]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20대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충동적 소비 경험 여부 및 인식. [자료 대학내일20대연구소]

대학내일20대연구소에 따르면 SNS에서 시발비용과 함께 언급된 단어로는 ‘퇴근길’과 함께 ‘택시’ 등 비교적 값비싼 운송수단이나 '치킨’ 등 음식이 대부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 직장인 신모(27·여)씨는 “내가 회사에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 정도 편안함을 누려도 되지 않겠느냐는 마음에서 매일 ‘택시 스튜핏’을 행한다”고 말했다. ‘스튜핏(stupid·어리석다)’이란 ‘짠돌이’ 행태로 유명해진 방송인 김생민(44)씨가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소비자들의 충동적인 소비를 발견할 때마다 내뱉는 말이다. 직장인 최모(25·여)씨는 “바쁜 업무에 치이다 퇴근을 할 때면 스스로 보상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엇이든 사서 귀가한다. 빈 손으로 들어가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고 말했다.
 
최근 『트렌드 코리아 2018』을 펴낸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는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KT스퀘어에서 열린 ‘2018 트렌드 키워드 발표회’에서 이 같은 소비 패턴을 ‘플라시보 소비(placebo consumption)’라고 이름 붙였다. 플라시보란 어떤 약을 먹을 때 효능을 확신하면, 설사 그 약이 가짜일지라도 실제 증상이 나아지는 효과를 뜻한다. 현대인들이 일상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금전적인 소비를 함으로써 심리적인 안정 효과를 거둔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이를 “가성비(價性比)에 가심비(價心比)를 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흥적인 소비의 이유를 설명하는 신조어는 더 있다. 조금만 주의했다면 절약했을 비용을 의미하는 ‘멍청비용’에는 할인 받을 수 있는 상품을 정가에 구매하거나, 부주의로 도서관에서 빌린 도서를 늦게 반납해 무는 연체료 등이 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돈을 쓰는 ‘쓸쓸비용’도 있다. 마음이 쓸쓸할 때 같이 얘기할 친구를 불러내기 위해 밥값을 배로 쓰는 것이 전형적인 예다.
 
'번아웃된 그대에게 쓸데없는 소비란 없다!'란 문구가 젊은 직장인들의 '비용의 합리화'를 대변한다. [인스타그램 캡처]

'번아웃된 그대에게 쓸데없는 소비란 없다!'란 문구가 젊은 직장인들의 '비용의 합리화'를 대변한다. [인스타그램 캡처]

전문가들은 이 같은 소비 행태에 대해 기분에 따라 소비를 한 뒤 이를 합리화 하기 위한 이유를 만드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경제학의 대원칙인 ‘합리적 선택’에서 벗어나, 우선 선택을 한 뒤에 합리성을 덧씌운다는 얘기다. 최근 한 라이프 잡지에 등장한 ‘번아웃된 그대에게 쓸데없는 소비란 없다!’ 등의 문구가 이 같은 ‘비용의 합리화’를 대변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비용이란 개념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표현하는 단어라고 본다. SNS를 통해 확산되다 보니 유행처럼 번져서 젊은층의 일상·소비생활을 규정하는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결국 신체적·정서적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스스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소비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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