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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끼니 30년간 2만1900번 대령…집에서 놀고 있다고?

중앙일보 2017.10.26 06:00
부부모임. [사진 freejpg]

부부모임. [사진 freejpg]

 
부부 모임에서 H의 남편이 친구 아내에게 H를 소개하면서 “집사람입니다. 집에서 그냥 놀고 있어요”라고 하더란다. 친구의 전문직 아내가 눈빛으로 H의 하는 일을 묻는 듯하자 남편이 앞질러 한 대답이란다. 남자들이 전업주부인 아내 얘기를 할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아내들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심하게 절망한다.

고혜련의 내 사랑 웬수(16)
자신이 하는 일은 가치가 높은 일이고
아내의 집안 일은 하찮다는 남자들이여
칭찬은 못해줄 망정 깎아내리지 말라


 
‘세상에 온종일 생색도 안 나게 해야 하는 집안일이 얼마나 태산인데 놀고 있다니. 끼니 대령 하루 2번, 30년간 2만 1900번, 설거지 2만 1900번, 집 안 청소와 빨래 도합 1만 6000번, 양복바지와 셔츠 다림질….’
 
H는 그 길로 돌아와 자신이 한 일을 남편에게 휴대폰 문자로 날린 후 말없이 장거리 해외여행을 떠났고 남편은 자신의 실수를 싹싹 빌며 앞으로 설거지를 도맡겠다고 나섰단다. H는 난생처음 이런 계산을 한 후 그 숫자가 엄청나 자신도 놀랐단다. 그리고는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설움이 밀려와 여행 내내 엉엉 울게 되더란다.
 
나 역시 그 숫자에 놀랐다. 한 끼 식사를 마련하는데 장보기부터 조리, 상차림, 설거지까지 얼마나 번거롭고 힘이 드는데. 거기다 아이들 도시락에 학교 진학에서 입시 준비까지. 한국의 아내들보다 바쁘고 유능한 여성들이 과연 이 지구 상에 있을까? 거의 전천후에 전지전능한 해결사 수준이다.
 
 
남자들의 배은망덕한 망발 
 
이제 주변에서 그런 배은망덕한 망발을 범하는 남자들을 보면 ‘참 딱한 사람이네’라는 생각이 들고 그 사람의 전 인격까지 의심하게 된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꼭 “집안 식구 먹여 살리느라 등골이 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자신이 하는 일은 가치가 높은 일이고 아내 일은 하찮다고 여기는 게 몸에 밴 것이다.
 
 
집안 식구 먹여 살리느라 등골이 휜다. [중앙포토]

집안 식구 먹여 살리느라 등골이 휜다. [중앙포토]

 

아내들은 괜스레 이런 생각 없는 남편 앞에 죄인인 양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특히나 매달 생활비를 손 벌려 받아쓰는 입장의 친구들은 종종 ‘치사함’을 떨칠 수 없단다. 게다가 지나가는 말로, 집에 있으면서도 재테크에 성공한 뉘 집 ‘마누라’ 칭찬할 때면 그야말로 세상 살맛이 안 난단다. 우울증에 잠 못 이루는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다.
 
최근 아내와 사별한 후 일손을 구할 수 없어 스스로 집안일을 책임져야 했던 한 남자 후배는 “아, 정말 집안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며 “아픈 몸으로 그 일을 묵묵히 다 해낸 아내에게 엎드려 사죄하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두 자녀의 저녁 독서실 도시락까지 하루 2끼 이상의 식사를 준비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전쟁을 치른다’는 그는 “고맙다는 말 한 번 해주지 못한 아내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했다. 
 
오늘부터라도 적어도 아내가 놀고 있다는 말은 하지 마시라. 그리고 “여보, 미처 몰랐어. 당신 정말 수고가 많아. 내가 뭐 도울 일 없을까?”라고 말해보자. 그러면 아내는 환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할 거다. “됐어요. 여보, 고마워요.”
 
 
아내들도 ‘아내’ 필요  
 
 
아내들이 집안일로 투정하는 것은 부려 먹으려는 것이 아니다. [중앙포토]

아내들이 집안일로 투정하는 것은 부려 먹으려는 것이 아니다. [중앙포토]

 
아내들이 집안일로 남편에게 투정하는 것은 그를 부려 먹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해도 해도 끝없는 수고를 좀 알아달라는 절박한 발버둥임을 알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아내들은 일상사에 지쳐 그 가혹한 ‘아내직’에 사표를 던지고 싶다. 
 
아내들도 ‘아내’가 필요하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소처럼 일하는 집안일에는 팔푼이처럼 눈감고 어린애같이 투정해대는 남편 말고 말이다. 온종일 노예 또는 비서인 양 묵묵히 온갖 일을 도맡아 하는 ‘아내’, 그 일꾼이 필요한 거다.
 
‘이혼 최고의 나라’라는 오명 아래 오래 살아온 부부의 ‘황혼 이혼’조차 갈수록 늘어가는 요즘, 아내 칭찬은 해주지 못할망정 깎아내리지는 말라는 얘기다. 배신감보다 더 사람을 골병들게 하는 게 또 있으랴. ‘졸혼’, ‘황혼 이혼’, ‘기러기 남편’ 모두 다 남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고혜련 (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hrko321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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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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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고혜련 (주)제이커뮤니케이션대표 필진

[고혜련의 내 사랑 웬수] 기자로 은퇴한 출판인. 결혼이 흔들리고 있다. 인륜지대사의 필수과목에서 요즘 들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과목으로 주저앉았다. 결혼 한 사람들은 ‘졸혼(卒婚)’과 ‘황혼 이혼’도 서슴지 않는다. 결혼은 과연 쓸 만한가, 아니면 애당초 폐기해야 할 최악의 방편인가? 한 세상 울고 웃으며 결혼의 명줄을 힘들게 지켜가는 선험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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