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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원자로 있는데···" 61년 원전 생태계 '흔들'

중앙일보 2017.10.25 17:20
A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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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원자로 있는데…" 61년 원전 생태계, 5개월 만에 '흔들' 
 
61년간 쌓아 올린 한국 원전 산업 생태계가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정부가 신고리 원전 5ㆍ6호기를 제외한 모든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키로 하면서다. 에너지업계에서는 한국 원전 산업이 앞으로 ‘신기술 도입 및 개발 중단→연구조직 붕괴→국제 경쟁력 하락→관련 기업 퇴출’이라는 최악의 수순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천지 1·2호기 건설 중단…세계 최고 원자로 APR+ '무용지물'
"국내 사용 않는데 수출 되겠나" 전문가 지적
신기술 도입 중단→연구 붕괴→경쟁력 하락→기업 퇴출 수순
건설·부품 협력사 2·3차 피해 불가피…사업 전환 움직임도
5년 뒤 기술 끊길 수도…경쟁력 뒤처지면 다시는 못 따라 잡아

 
지난해만 해도 원자력 업계는 한국이 조만간 세계 원전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이 7년간 2000여억원의 예산을 들여 2014년 개발한 원자로 APR+때문이다. 이 원자로는 발전 용량과 효율·안전성 등 모든 측면에서 이전 모델인 APR1400은 물론 해외 원자로들보다 앞선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발전기 침수로 전원이 꺼지는 바람에 냉각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피해가 더 커졌다. 그러나 APR+는 중력 등 자연력에 의해 냉각수가 끊임없이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사태에 대비했다. 특히 원전 설계의 핵심 코드와 계측 제어 설비 등 핵심 기술도 100% 국내 기술이었다. 이전 모델인 APR1400의 경우 원천 기술을 보유한 웨스팅하우스가 기술 유출 가능성을 두고 반발하는 바람에 중국 수출에 실패한 바 있다.  
 
APR+를 야심 차게 준비한 한수원은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2026~27년 완공되는 천지 원전 1ㆍ2호기에 처음 도입할 계획이었다. 수출도 염두에 뒀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기준에 맞춰 APR+의 표준설계 인가 심사를 벌였다. .  
 
한수원 관계자는 “오랜 기간과 비용을 들여 개발한 APR+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수준의 기술이지만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사장될 수순을 밟고 있다”고 토로했다.
 
애써 개발한 기술을 함부로 버린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정부는 원전 기술의 해외 수출을 보완책으로 꺼내들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국내에 도입하지 않은 원자로를 구입할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 국내에서 충분한 운영 경험을 쌓지 않은 원자료는 국제 시장에서 신뢰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한수원과 APR+를 공동 개발한 한 중공업사 관계자는 “원천 기술이 있으면 원전 수출 시 건설부터 운영까지 일괄 수주하게 돼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며 “미국과 영국이 APR+에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정부의 원전 건설 중단 결정으로 빛을 못 볼 가능성이 커졌다”고 전했다.  
 
국내 수주와 수출이 틀어막히면 원전 개발에 참여하는 기업들에 피해가 예상된다. 한국 원전은 1956년 원전 1세대의 미국ㆍ영국 유학을 시작으로 61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 기간 동안 구축된 정부 발주, 공기업의 개발 및 운영, 대기업의 건설, 중소기업의 부품 공급으로 이어지는 생태계가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  
 
당장은 신고리 5ㆍ6호기 건설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신규 원전 공사가 모두 취소되면 영국ㆍ사우디아라비아ㆍ체코 등 해외 사업에 기댈 수밖에 없다. 2022~23년, 2026~27년은 발주가 없어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 일부 부품사는 “원전 사업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푸념한다.
 
원전에 들어가는 열풍기 부품을 납품하는 J사 관계자는 “작은 회사는 대기업이 발주하는 제품에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산업이 사라지면 경영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현재로서는 중국 수요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충격에 빠진 것은 중소기업 뿐만이 아니다. 원자로를 만드는 두산중공업이나 전선을 납품하는 LS산전, 건설사인 현대건설ㆍ삼성물산 등 대기업들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주력 제품 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곳도 있다.  
 
두산중공업의 한 임원은 “먹을 게 없어 손가락이라도 핧아야 할 심정”이라며 “해외 발전소 수주 경쟁은 물론 풍력ㆍ태양광 발전기의 기자재 사업까지 뛰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생태계가 무너지면 국제 경쟁에서 도태돼 그 격차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1970년대 세계 원전시장을 장악했던 미국은 스리마일 원전 사고로 30년간 자국 원전 건설이 중단되면서 주도권을 일본ㆍ러시아 등에 내줬다.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는 “시공 능력이 없으면 기술자도 사라지고, 기술자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산업이 죽는다. 5년만 지나도 세대가 끊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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