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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100주년]푸틴은 모른 척하지만, 국민은 고통 잊지 않았다

중앙일보 2017.10.25 15:00
1917년 10월 조직된 노동자와 시민들은 붉은 기를 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으로 진격했다. 그후 100년이 지난 2017년 겨울궁전 앞을 가로지르는 네바강변은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이들 요즘 신세대들에게 조명을 밝힌 겨울궁전은 밤을 즐기는 배경의 의미 이상이 아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년들이 지난 6월29일(현지시간) 새벽 1시20분 불 밝힌 겨울궁전을 배경으로 밤을 즐기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조문규 기자

1917년 10월 조직된 노동자와 시민들은 붉은 기를 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으로 진격했다. 그후 100년이 지난 2017년 겨울궁전 앞을 가로지르는 네바강변은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이들 요즘 신세대들에게 조명을 밝힌 겨울궁전은 밤을 즐기는 배경의 의미 이상이 아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년들이 지난 6월29일(현지시간) 새벽 1시20분 불 밝힌 겨울궁전을 배경으로 밤을 즐기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조문규 기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위치한 스트리트아트뮤지엄. 지난 여름 찾은 이 미술관엔 군인들이 총칼로 서로를 찔러 선혈이 낭자한 대형 벽화부터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두상이 담긴 쓰레기통 모양의 조형물까지 파격적인 작품들로 가득했다. 모두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러시아 공산 정권 일으킨 혁명 100주년
푸틴 정부는 기념 행사 없이 지나가
정권 홍보에 도움 되는 스탈린만 우상화

그러나 국민들은 "우리는 잊지 않았다"
"스탈린이 억압한 기억 남아 있다" 반발도
동구권 국가선 아직 남은 소련 흔적에 고심

지난달 30일 전시를 마친 러시아 스트리트아트뮤지엄의 '혁명 100주년' 기념 전시회 '밝은 날이 오고 있다'는 러시아 내에서 1917년 벌어진 혁명에 본격적으로 해석을 시도한 보기 드문 사례다. 이번 전시엔 러시아 작가들을 포함해 전 세계 12개국 60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이 미술관의 홍보담당 다리나 그리보바는 "해외 사람들은 러시아 혁명을 아주 흥미로운 얘기거리로 생각하지만 이곳 러시아에선 뭘 하든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며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혁명을 주제로 뭔가를 하길 꺼린다. 혁명과 관련된 전시는 해외에서 더 많이 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야외 폐공장을 개조해 만든 스트리트아트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러시아혁명 100주년 기념 전시회. 100년 전 10월 혁명 당시 군중들을 상징하는 붉은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다. 조형물 뒤로는 혁명을 주도하는 소비에트 정부와 이를 따르는 군중들을 나타낸 대형 회화 작품이 걸려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조문규 기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야외 폐공장을 개조해 만든 스트리트아트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러시아혁명 100주년 기념 전시회. 100년 전 10월 혁명 당시 군중들을 상징하는 붉은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다. 조형물 뒤로는 혁명을 주도하는 소비에트 정부와 이를 따르는 군중들을 나타낸 대형 회화 작품이 걸려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조문규 기자.

그리보바의 말처럼 혁명 100주년을 맞이한 러시아에서 혁명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스트리트아트뮤지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200여개 미술관·박물관 가운데 혁명 100주년을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한 유일한 사립 미술관이다. 영국·미국·독일 등 서구권 국가에서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부터 연극, 미술 전시회, 특별 음식 메뉴까지 다양한 행사와 상품이 1년 내내 쏟아져 나온 것과 대조적이다.  
 
올해 초 러시아 왕정을 종식시킨 2월 혁명 100주년을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보낸 러시아 정부는 오는 11월 7일 세계 첫 공산 정권을 수립한 10월 혁명 100주년 기념일에도 공식 성명을 내놓지 않을 전망이다.
 
이석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상트페테르부르크 관장은 "일부 박물관들이 자체적으로 행사를 하고는 있지만 러시아 정부 차원의 공식적 기념 행사는 없다"며 "혁명일이 다가오고 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민들도 혁명 100주년이라고 해서 행사를 기대하거나 관심을 드러내는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전했다.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시내 중심가 레닌 광장에 서 있는 레닌 동상.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겨울 외투를 걸친 모습이 인상적이다. [중앙포토]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시내 중심가 레닌 광장에 서 있는 레닌 동상.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겨울 외투를 걸친 모습이 인상적이다. [중앙포토]

 러시아 정부가 혁명을 기념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권력자 타도에 대한 기념행사’를 불편해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혁명의 열기가 자칫 집권 세력의 기반 약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푸틴은 10월 혁명과 이를 주도한 레닌에 대해 과거 수 차례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유럽대학의 보리스 콜로니츠키 교수는 "실용주의자인 푸틴 대통령은 혁명에 부정적이지만 공개 석상에서 그런 얘기를 잘 꺼내려 하지 않는다"며 "혁명 얘기를 꺼내봐야 국론이 분열되고 지지층만 잃을 뿐 푸틴 대통령으로선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혁명을 기념하기는 싫고, 부정할 수도 없으니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척 무시한다는 설명이다.
 
 푸틴 정부의 침묵 속에 러시아 국민들의 혼란은 깊어져 간다. 혁명을 둘러싼 러시아인들의 감정은 복잡하게 얽혀있다. 혁명이 일어난 시기부터 따지면 100주년이지만 옛소련이 무너지면서 혁명이 실패로 종결된 것은 고작 26년 전인 1991년이다. 혁명에 얽힌 러시아인들의 기억이 정리되기엔 짧은 시간이다. 혁명이 필요한 일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무엇을 계승하고 어떤 점을 반성해야 할지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생각은 제각각이다.
 
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인들이 겪고 있는 혼란을 잘 보여준다. 1917년 러시아인들은 혁명의 열기 속에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를 왕좌에서 끌어내 총살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고 10여년 뒤인 2000년 러시아 정교회는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정치 탄압의 희생양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러시아 정부는 니콜라이 2세의 처형을 주도한 외교관 표트르 보이코프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 '보이콥스카야'의 이름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니콜라이 2세가 혁명 광기의 희생양이었는지, 아니면 처형당해 마땅했던 폭군이었는지 평가가 정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2011년 모스크바 마네즈 광장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복장을 착용한 사람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깃발에는 '조국을 위해, 스탈린을 위해'라고 쓰여 있다. [AP=연합뉴스]

2011년 모스크바 마네즈 광장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복장을 착용한 사람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깃발에는 '조국을 위해, 스탈린을 위해'라고 쓰여 있다. [AP=연합뉴스]

푸틴 정부는 혁명에 대한 언급을 피하면서도 교묘하게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푸틴 정부가 교과서와 공영 방송 등을 통해 스탈린의 업적을 기리는 반면 자국민 200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스탈린의 인권 탄압은 적게 언급해 스탈린의 인기를 끌어올렸다고 분석했다. 레바다센터의 레프 구드코프 연구원은 NYT에 "푸틴 정부는 스탈린의 업적을 부각시킴으로써 개인의 삶보다 공동체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이념을 강조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종의 '역사 공작'이 진행됐다는 얘기다. 
 
지난 6월 러시아 여론조사 업체 레바다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스탈린을 꼽았다. 소련 붕괴 직전인 1989년까지만 해도 레닌이 72%의 지지를 얻어 위대한 인물 순위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한 반면 스탈린은 12%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6월 여론조사에선 스탈린이 38%의 지지율로 1위,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더 푸시킨이 34%로 2위를 기록했으며 레닌은 32%로 4위에 그쳤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야외 폐공장을 개조해 만든 스트리트아트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러시아혁명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 벽에는 '철의 장막'을 상징하는 철판에 혁명기 소련 국민들의 모습을 겹쳐 놓은 설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조문규 기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야외 폐공장을 개조해 만든 스트리트아트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러시아혁명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 벽에는 '철의 장막'을 상징하는 철판에 혁명기 소련 국민들의 모습을 겹쳐 놓은 설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조문규 기자

그럼에도 러시아인들의 머릿속엔 혁명에 얽힌 기억이 뿌리 깊이 남아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물리학 교수로 일하는 나탈리아(여, 60)는 "스탈린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의견을 내기 때문에 여론조사 결과도 스탈린에 우호적으로 나오는 것"이라며 "스탈린 시절에 억압받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 기억은 여전히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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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학생 아냐(20)는 "옛 사상은 잊혔지만 우리 러시아인들이 압제에 맞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혁명을 일으켰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며 "러시아 혁명은 우리 기억에 새겨진 도장 같은 것이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위치한 스트리트아트뮤지엄의 다리나 그리보바 홍보팀장. 조문규 기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위치한 스트리트아트뮤지엄의 다리나 그리보바 홍보팀장. 조문규 기자

 
스트리트아트뮤지엄의 그리보바는 "푸틴 정부는 혁명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른다. 저항의 역사인 혁명을 가르치면 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피해가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잔혹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돌이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리보바는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말하는 게 두렵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이번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이름 바꾸고, 간판 부수고…동구권에도 남은 혁명의 흔적
폴란드 바르샤바 수도 한복판에 위치한 문화궁전 (가운데) / 이 건물은 과거 폴란드가 공산국가였던 시절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원조로 세워진 건물이다. 현재는 박물관, 영화관, 전망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바르샤바=최승식 기자

폴란드 바르샤바 수도 한복판에 위치한 문화궁전 (가운데) / 이 건물은 과거 폴란드가 공산국가였던 시절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원조로 세워진 건물이다. 현재는 박물관, 영화관, 전망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바르샤바=최승식 기자

 러시아 혁명의 기억은 20세기 소련의 영향을 깊숙히 받았던 동구권 여러 국가들에서도 아직까지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폴란드 바르샤바 도심 한가운데 솟은 마천루, 문화과학궁전이다. 높이 42층, 면적 23000㎡로 바르샤바 도심 어디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이 건물은 영화관, 공연장, 쇼핑몰 등 각종 문화·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이 건물이 1955년 스탈린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이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였던 폴란드를 사실상 지배했던 스탈린은 러시아 노동자 5000명을 바르샤바에 파견해 이 건물을 짓게 했다. 바르샤바 주민들에게 이 건물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귀중한 시설인 동시에 치욕스러운 강점의 산물이기도 하다. 때문에 폴란드에선 이 건물을 철거하자는 주장부터 도색을 새로 하자, 그냥 내버려두자는 등 다양한 의견이 오간다.
 
그러나 이 건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주민 상당수도 없어선 안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건물 전망대에서 만난 바르샤바 주민 모니카(43)는 "종종 어린 딸을 이곳에 데려와 도시를 보여준다"며 "역사적으로 반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젠 이 건물이 없는 바르샤바는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폴란드의 민주화 성지로 알려진 그단스크 조선소도 폴란드가 공산국가였던 1967년부터 89년까지 블라디미르 레닌 조선소란 이름이었다. 폴란드가 민주화되면서 조선소 정문에 걸려 있던 레닌 간판은 폐기됐지만, 2012년 일부 정치인들이 이 간판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복원시켜 재차 논란이 되고 있다.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화 성지에 레닌의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시위를 벌였고 몇몇 강성 단체들은 이 간판을 떼어내 파괴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서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미국 가수 프랭크 자파의 조각상. 빌니우스=조문규 기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서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미국 가수 프랭크 자파의 조각상. 빌니우스=조문규 기자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에선 시민들이 레닌 동상을 철거한 자리에 미국의 팝 문화를 상징하는 가수 프랭크 자파의 흉상을 세웠고, 우크라이나에선 블라디미르 레닌 거리를 영국 가수 존 레논의 이름을 딴 존 레논 거리로 바꾸는 등 적극적으로 혁명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반면 친러 성향이 짙은 국가들은 러시아 혁명을 국정에 적극 이용하고 있다. 바르샤바에서 유학 중인 벨라루스인 보바 아가얀은 "벨라루스 대통령은 지지층 결집을 위해 혁명을 이용하고 있다"며 "대통령 궁전 앞에 레닌 궁전을 짓는 등 레닌을 자기 정권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르샤바·그단스크·빌니우스=이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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