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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복심과 중국의 키신저...중국의 새 지도부 면면

중앙일보 2017.10.25 13:22
시진핑(習近平) 2기 체제를 이끌 지도부의 면면이 25일 공개됐다. 시 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 이외에 다섯 명의 새로운 상무위원이 이날 열린 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중전회)에서 선출된 것이다.  
 

중국 지도부 면면

중국의 새로운 상무위원 5인방, 그래픽=김주원 기자

중국의 새로운 상무위원 5인방, 그래픽=김주원 기자

시 주석의 측근 이외에도 공산주의청년단, 상하이방 출신 인사들이 골고루 포함돼 계파간 균형을 이뤘다. 하지만 측근, 비(非) 측근을 불문하고 시 주석과 함께 근무한 경험이나 가문 내력 등 시 주석과의 인연이 깊은 사람들로 채워진 게 눈에 띈다.    
 
새로운 상무위원 5인방  
리잔수(栗戰書) 중앙판공청 주임.

리잔수(栗戰書) 중앙판공청 주임.

 
시진핑의 복심 리잔수
 
서열 3위의 리잔수(栗戰書)는 시 주석의 측근 중 측근이다. 비서실상 격인 중앙판공청 주임을 5년 내내 맡겼다는 게 시 주석의 절대 신임을 말해 준다.  
신임의 배경에는 30대 청년 시절부터 쌓은 인연이 작용하고 있다. 시 주석이 1983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서기로 일할 때 리 주임은 인접한 우지(無極)현 서기였다. 지방 근무가 처음인 시 주석은 나이가 세 살 위인데다 행정 경험이 풍부한 리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다. 나중에 리가 시 주석 일가의 고향인 산시(陝西)성으로 옮겨 간 것도 시 주석과의 인연을 더 깊게 하면서 집안끼리의 친분도 두터워졌다. 30여년전 허베이성 시골에서 맺은 인연이 지금의 중난하이로까지 이어진 배경이 된 것이다.  
리잔수는 한때 베이징 중앙무대와는 거리가 먼 ‘삼북(三北) 간부’의 전형으로 통했지만 이 역시 그의 출세에 밑거름이 됐다. 삼북이란 화북(華北)ㆍ서북(西北)ㆍ동북(東北)을 말하는 것으로 광둥ㆍ상하이 등 동남연안지방에 비해 낙후된 지방이다. 리잔수는 허베이ㆍ산시ㆍ헤이룽장(黑龍江)에서만 40년간 일했고 2010년 역시 낙후지역인 구이저우(貴州)서기로 발탁되면서 처음 삼북을 벗어났다. 그러는 동안 밑바닥 현(縣)서기에서부터 시(市)서기, 성장(省長), 성 서기의 단계를 모두 밟았다. 시 주석과의 공통점이다. 18기 정치국원 25명 가운데 농촌지역 현서기를 거친 지도자는 시 주석과 리 주임 두 사람 밖에 없었다. 기층(基層)에서의 경험과 단련을 대단히 중시하는 시 주석의 눈에 들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왕양(汪洋) 국무원 부총리

왕양(汪洋) 국무원 부총리

 
경제사령탑 왕양
 
수석부총리로 경제분야에서 계속 일할 것으로 점쳐지는 왕양(汪洋)은 비교적 개혁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충칭시, 광둥성의 서기를 차례로 거쳐 경험도 풍부한 편이다.  
광둥성 서기 왕양이 추진한 ‘등롱환조(騰籠換鳥ㆍ새장을 비워 새를 바꾼다는 뜻)’ 정책은 낙후산업을 퇴출시키고 첨단 기술과 고부가치 산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그는 “시대에 뒤처진 기업을 억지로 살려선 안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광둥 모델’로 불린 왕양의 정책은 다른 지방 간부들이 줄지어 견학을 위해 방문하는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이 현재 역점을 두는 중성장 시대의 구조개혁 정책인 뉴노멀(신창타이ㆍ新常態) 경제전략을 10년 이상 앞당겨 시행한 셈이다.  
안후이(安徽)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왕양은 식품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청년단에 들어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지방 시장을 하던 1990년대 초반부터 과감한 개혁성향을 보였다. 당시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30대의 젊은 지방간부인 왕양을 직접 불러 면담하고 격려한 건 유명한 일화다.  그 이후 38세에 안휘성 부성장에 등용되는 등 고속 승진의 길을 달렸다.  
시진핑 1기 체제에선 국무원 부총리로 농업과 대외무역을 맡았다. 또 시 주석이 역점을 둔 빈곤퇴치 대책을 총괄하면서 시 주석과의 접점도 많이 생겨났다. 올 4월 미ㆍ중 정상회담의 결과로 창설된 미ㆍ중 경제대화에 수석 대표로 참석하는 등 국제적 활동의 폭도 넓히고 있다.  
방한 경력도 두 차례에 이른다. 2009년 광둥성 서기 외교부 초청으로 방한했고, 2015년에는 중국 방문의 해 사절로 한국에 와 정재계 지도층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왕후닝(王滬寧)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왕후닝(王滬寧)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중국의 키신저 왕후닝
 
왕후닝(王滬寧)의 서열 5위 상무위원 진입은 공산당의 정통 엘리트가 아닌 학자 출신이란 점에서 이례적인 발탁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미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시절부터 3대(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째 중국 최고권력자의 책사(策士)역할을 하며 중국 공산당의 통치 철학을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그의 비범함을 엿볼 수 있다.  
왕은 29세에 상하이의 명문 푸단(復旦)대 조교수, 33세에 정교수가 된 중국 정치학계의 기대주였다. 교환교수로 1년간 미국 생활을 했지만 학문 성향은 서구 민주주의 체제에 비판적이다. 그는 중국과 같은 변혁기의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신(新)권위주의’ 입장의 대표격이었다. 이를 눈여겨본 장쩌민은 95년 왕을 중앙정책연구실로 불러들여 ‘3개대표론(三個代表論)’을 완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맡겼다. 공산당이 타도할 대상이었던 자본가는 이 이론에 따라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장의 후임 후진타오(胡錦濤)는 자신의 통치이론인 ‘과학적 발전관’을 완성하는 임무를 왕에게 맡겼다. 이번 당대회에서 시 주석이 내건 ‘신시대 사상’도 왕에 의해 완성됐다고 봐야 한다.  
평소 시 주석의 연설 원고와 중요 발언도 왕의 손을 거쳐서 나온다. 시 주석의 정상회담과 중요 국내 회의에 반드시 왕이 배석하는 이유다. 당내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기 며칠 전 정치국원들을 대상으로 사전 브리핑이 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전에 의견을 조율하기 위한 것인데 이를 주도하는 사람이 왕후닝”이라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칼 로브(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의 책사)와 헨리 키신저를 합친 인물”이라고 왕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중앙조직부장 자오러지(趙樂際)

중앙조직부장 자오러지(趙樂際)

시진핑의 칼 자오러지
 
서열 6위에 오른 자오러지(趙樂際)는 시진핑 1기 체제에서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저승사자’왕치산(王岐山) 이 이끄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호랑이든 파리든 가리지 않고 부패 관리를 적발하고 나면 결원을 메꾸는 인사 등 후속 작업은 자오가 이끄는 중앙조직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왕치산이 물러난 뒤 자오가 왕의 후임 기율위 서기를 맡는 것은 ‘엄정한 당 관리’의 양대축인 조직부와 기율위의 업무 연관성을 고려할 때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그는 중앙순시영도소조 부조장을 겸임하며 조장인 왕치산과 긴밀하게 협조했다. 쩡칭훙(曾慶紅), 허궈창(賀國强) 등 조직부장이 상무위원으로 발탁된 전례도 적지 않다.    
혁명가 2세 출신인 그는 오랫동안 서북 변경인 칭하이(靑海)성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가 42세에 칭하이 성장, 46세에 칭하이 서기에 오른 것은 모두 전국 최연소 기록이었다. 자오의 가문은 시진핑의 가문과 혁명으로 인연을 맺은 관계다. 할아버지 자오서우산(趙壽山)은 시 주석의 부친인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와 서북 지역에서 함께 일했고, 16세에 혁명에 가담했던 부친 자오시민(趙喜民)은 시중쉰의 부하였다. 
고향도 같은 산시성이다. 2007년 산시성 서기로 옮긴 자오러지는 푸핑(富平)현에 있던 시중쉰 묘를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관을 조성하는 등 성역화사업을 추진했다. 청년 시진핑이 문화대혁명 기간에 7년동안 하방(下放) 생활을 한 량자허촌(梁家河)의 성역화에 앞장선 것도 자오러지다. 
산시성 서기 재직 시절 그의 업적 가운데 하나가 시안(西安)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고 건설에 착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기업인들과도 교류가 잦았다. 
 
한정(韓正)상하이 서기

한정(韓正)상하이 서기

상하이방 대표주자 한정
  
현직 상하이 서기인 한정(韓正)은 42년간의 공산당 경력을 모두 상하이에서 보냈다. 두 세곳의 지방 근무를 거치게 하는 중국 공산당의 인재양성 시스템에서 이례적인 존재다. 그에게는 자연스레 장쩌민 주석 계열의 ‘상하이방(幇)’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청년시절 창고관리원과 신발공장 근무 등 밑바닥에서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주경야독으로 야간 대학을 졸업한 자수성가형이다. 그를 발탁한 사람도 장쩌민 계열인 주룽지(朱鎔基)전 총리였다. 1987년 상하이 서기 겸 시장이던 주룽지가 화학공장 시찰에 나섰을 당시 부공장장이던 한정을 눈여겨보고 상하이 시의 공청단 간부로 발탁한 것이다. 그 이후 상하이 인민대표 역대 최고득표율, 최연소 상하이 시장 등의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시 주석과의 접점도 예사롭지 않다. 2007년 천량위(陳良玉) 실각 사건 직후 상하이 서기로 부임해 온 시 주석의 밑에서 시장으로 일하며 7개월간 호흡을 맞췄다. 시 주석 집권 후에는 당 간부 가족들의 이권 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규정을 선제적으로 만들었다. 이는 시 주석이 강조하는 ‘엄정한 당 관리(종엄치당)’의 모범으로 인정받았다. 상하이방 색깔이 짙어 불리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그가 상무위원에 발탁된 이유로 풀이된다.
상하이를 방문한 한국 요인들과도 접촉이 많았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곧은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며 "기업체 관리자 경험이 있어 기업문화를 잘 이해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서유진 기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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