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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트럼프가 오는데

중앙일보 2017.10.20 02:01 종합 35면 지면보기
김영희 칼럼니스트 대기자

김영희 칼럼니스트 대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11월 7~8일 한국 방문은 그 중요성 순위에서 1952년 1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한국 방문 다음은 된다. 아이젠하워는 11월 대선 유세에서 정전협상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는 한국전쟁을 조속히 종식시키기 위해 취임 전 한국에 가겠다는 공약을 했다. 그는 여의도공항으로 입국해 동숭동 8군사령부에 머물면서 미군 장성과 병사들로부터 전쟁 상황을 경청하고 군용기로 전선의 지형지세를 직접 관찰했다.
 
그는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는 걸 피했다. 아이젠하워는 중앙청 광장의 시민 환영대회도 보이콧했다. 단상의 각료들과 단하의 수만 명 시민은 허탈감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2월의 혹한에 양복 차림으로 광릉의 한국군 수도사단을 시찰 중인 아이젠하워를 찾아가서야 콧대 높은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잠깐 만날 수 있었다. 미군 장성 한 사람이 추위에 떠는 이승만에게 야전점퍼를 입혀 줬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와의 그 정도 만남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김태선 서울시장을 동숭동으로 보내 아이젠하워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방문을 요청하려 했다. 그러나 김태선은 8군사령부의 정문도 통과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백선엽 장군을 보냈다. 백선엽은 8군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와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에게 아이젠하워가 경무대를 방문하지 않고 떠나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전시의 국군을 통수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아이젠하워는 공항으로 가는 길에 경무대에 들렀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는 10개 사단의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전쟁은 이듬해 7월 휴전협정 조인으로 끝나고 10월에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이승만이 자신을 피해다니는 아이젠하워를 경무대로 초치해 회담하지 못했다면 아이젠하워의 전쟁 중 방한은 한·미 관계사에 그렇게 큰 획은 긋지 못했을 것이다.
 
트럼프는 한·미 관계가 확연히 달라진 상황에서 한국에 온다. 아이젠하워는 진행 중인 전쟁을 끝내러 왔고, 트럼프는 전쟁을 방지하러 온다. 아이젠하워 방한의 결실인 한·미 동맹이 60여 년 동안 지켜온 한반도의 무장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전운 급박한 한반도가 트럼프 방한의 배경이다. 북한의 도발로든 미국의 선제공격으로든 한반도가 다시 묵시록의 현장이 될지 안 될지는 트럼프가 서울에서 세계를 향해 발신할 메시지에 달렸다.
 
김영희칼럼

김영희칼럼

지금 동북아에는 트럼프의 활용을 기다리는 고무적인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이 지금 열리고 있는 공산당대회에서 집권 2기의 틀을 짜고 나면 미·중 관계와 한반도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그의 목표는 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2020년까지 중국을 전면적 샤오캉(小康)사회로 만드는 것이다. 샤오캉사회는 의식주 걱정 없는 국민이 약간의 문화생활을 누리는 사회다. 한반도 주변 지역의 안정 없이 샤오캉사회는 만들 수 없다. 제2의 한국전쟁은 중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시진핑의 꿈을 덧없는 백일몽으로 날려 버릴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북한 제재와 압박에 동조할 것이다. 김정은이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중국의 문전에서 위험한 불장난을 계속하면 시진핑은 중국의 독자적인 맞춤형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와의 회담에서는 북한 문제에 관한 지속성 있는 해결책이 논의될 것이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한국이 빠진 미국과 중국 간의 한반도 빅딜이다. 키신저를 포함한 미국의 친중파 현실론자들이 그런 방향으로 분위기를 잡고 있다.
 
트럼프가 서울에서 발신할 메시지는 최대의 압박과 제재로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멈추고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라는 촉구와 경고일 것이다. 트럼프는 생각나는 대로 트위터를 날리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무식하지만 영리한 장사꾼이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와 최첨단 무기로 갑질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동북아 순방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그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오늘의 동북아는 트럼프가 미국의 이익만 챙기는 3류 정치인(politician)에서 곧 터질 것 같은 전쟁을 방지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공동 번영의 초석을 놓은 큰 정치가(statesman)로 도약할 흔치 않은 무대요 기회다. 꽁꽁 얼어붙은 남북 관계의 수면하에서도 아주 작은 난류의 조짐이 보이는 것도 트럼프의 큰 정치가 만들기에 보탬이 될 것이다.
 
김영희 칼럼니스트·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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