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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29) “남김 없이 먹고, 남김 없이 사는 사람~”

중앙일보 2017.10.17 11:00
누가 저 반달처럼 생긴 쪽박으로 구름까지 다 박박 긁어 드셨나보다. 하늘이 말끔하다. [사진 조민호]

누가 저 반달처럼 생긴 쪽박으로 구름까지 다 박박 긁어 드셨나보다. 하늘이 말끔하다. [사진 조민호]

 
행주로 닦아 놓은 듯 하늘이 말끔히 치워졌다. 아침만 해도 밀가루 뿌려놓은 듯하던 하늘을 쪽박 반달 하나 달랑 남겨두고 누가 빡빡 닦아 놓았다. 음식을 먹고 나면 깨끗이 비운 그릇에 숟가락 하나 달랑 얹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선배가 생각났다.

첫 직장서 함께 일한 디자이너 출신
회사 관두고 돈 안되는 학교 열어
음식이든 돈이든 남기면 악취난다며
“자신만의 향기나는 삶 디자인하겠다”

 
‘잘~ 먹었습니다 디자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내 첫 직장에서 함께 광고했던 디자이너 출신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돈 되는 광고를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가 돈 안 되는 환경디자인 공부를 하더니 제주도로 내려갔다. 이름만 들어도 쪽박 차기 딱 알맞겠다 싶은 ‘행복한 생명 그린대학’이라는 작은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불러다 가르치고, 이곳저곳에 차비도 안 나오는 강의를 다닌다.  
 
 
’잘~ 먹었습니다 디자인“ 수제비의 before와 after. [사진 조민호]

’잘~ 먹었습니다 디자인“ 수제비의 before와 after. [사진 조민호]

 
“디자인이라는 게, 상품이나 서비스를 알리는 역할도 있지만 자기를 디자인해서 자신만의 향기를 나누어야 한다”라고. 작정하고 돈 버는 일 하고는 멀어지겠다는 소리다. 이게 왕년의 광고쟁이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린가?
 
음식을 만들 때, 혼자 먹을 만큼의 양을 준비하려고 노력하지만 늘 다 먹지 못하고 버린다. 인스턴트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재료를 사다 일일이 손질하다 보면 음식물 쓰레기가 많아진다. 집에서 먼 쪽 마당 한쪽에 구덩이를 파 남은 음식물을 버리는데, 하루만 내다 버리지 않아도 집안에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밴다.  
 
 
’잘~ 먹었습니다 디자인“ 카레의 before와 after. [사진 조민호]

’잘~ 먹었습니다 디자인“ 카레의 before와 after. [사진 조민호]

 
내가 해석한 '잘~먹었습니다 디자인'에 담긴 뜻은 이렇다. ‘남기지 않을 만큼만 준비하고, 남기지 않을 만큼만 제 그릇에 담고, 남기지 않을 만큼만 벌어, 냄새가 나지 않는 향기로운 삶을 디자인한다~’ 음식을 남기면 쓰레기에서 냄새가 나듯이, 은행에도 가지 못하고 골방에 처박힌 구린 돈다발에서는 음식물 쓰레기 냄새 저리가라는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던가.
 
이 양반 이름이 왕종두다. 함께 근무할 때 “왕입니다요~” 하며 스스로를 소개하고는 했는데 그 이름처럼 향기로운 삶의 왕 노릇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부러워 한다. 나도 오늘 저녁은 비빔밥이나 해서 그릇 밑바닥 고추장까지 싹싹 닦아 먹어야지~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minozo@naver.com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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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호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필진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 퇴직은 갑자기 찾아왔다. 일이 없는 도시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이러다 죽는 날 아침에 “뭐 이렇게 빨라, 인생이?” 할 것 같았다. 경남 거창 보해산 자락, 친구가 마련해준 거처에 ‘포월침두’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평생 처음 겪는 혼자의 시간을 시작했다. 달을 품고(抱月) 북두칠성을 베고 자는(枕斗) 목가적 생활을 꿈꿨지만 다 떨쳐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도시의 취향과 입맛으로 인해 생활은 불편하고 먹거리는 가난했다. 몸을 쓰고, 글을 쓰자. 평생 머리만 쓰고 물건 파는 글을 썼으니 적게 먹어 맑은 정신으로 쓰고 싶은 글, 몸으로 쓰는 글을 쓰자, 했다. 올 3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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