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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만났다, 제대로 만든 위안부 영화

중앙일보 2017.10.17 01:00 종합 25면 지면보기
     관객 300만 명을 넘긴 ‘아이 캔 스피크’ (김현석 감독). 나문희, 이제훈의 연기 호흡이 좋다. [사진 각 영화사]

관객 300만 명을 넘긴 ‘아이 캔 스피크’ (김현석 감독). 나문희, 이제훈의 연기 호흡이 좋다. [사진 각 영화사]

김현석 감독의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화제다. 관객 300만 명을 넘어섰다. 영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할머니 옥분(나문희)의 숨겨진 사연에 대한 이야기다. ‘위안부’ 소재지만 기존의 엄숙주의와 달리 나문희 배우의 탁월한 생활 코미디 연기,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의 가치, 연대와 승리의 기억을 보듬는 휴먼드라마가 포개져 ‘위안부’ 소재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의 한국영화로 완성됐다.
 

관객 300만 넘긴 ‘아이 캔 스피크’
위안부 피해자를 희생자·박제 아닌
생활인이자 이웃으로 자리매김

상처 헤집는 폭력적 이미지 없이
일본 만행에 대한 공분 불러일으켜

사실 ‘위안부’ 문제를 영화로 재현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전쟁범죄라는 세계사적 외연과 그것의 반대급부로서 피식민 민족공동체의 상흔이 전제된다. 피식민 안에서도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라는 점에서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여기에 사과는커녕 가해 흔적을 지우기에 바쁜 일본 정부의 2차 가해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한국 정부의 무능이 덧붙여진다. 세계사적 이슈이자 과거, 현재, 미래가 중첩된 민족적 과제이며 무엇보다 여성 인권의 문제이기도 한 이 복잡한 실타래를 한국영화는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아이 캔 스피크’는 좀 더 음미되어야 한다.
 
2016년 ‘귀향’ (조정래 감독). 위안부 소재 영화로 크게 흥행했다. [사진 각 영화사]

2016년 ‘귀향’ (조정래 감독). 위안부 소재 영화로 크게 흥행했다. [사진 각 영화사]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계기에 영화 ‘귀향’이 있다. 흥행 면에서 크게 성공했지만 이 영화는 다분히 문제적이다. 영화를 지탱하는 것은 피해자 여성을 지켜주지 못한 남성의 속죄의식이다. 이것 때문에 영화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며 심지어 위험해졌다. ‘귀향’은 정작 여성의 상처에 관심이 없다. 그녀들의 사연은 영화 안에 세심하게 쌓이는 게 아니라 자매애, 고향에 대한 그리움, ‘아리랑’과 같은 영화 바깥의 추상적인 관념에 붙들려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피해자에게 가해진 폭력을 단지 이미지 차원으로 과시하기에 바쁘다는 점이다. 스크린은 성폭력 이미지, 벗고 맞는 몸, 처절한 표정들로 채워진다. ‘위안부’라는 복잡한 문제를 남성의 속죄의식에 기대 위로한다면서 도리어 남성화된 관음의 시선에 피해자의 고통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반면 ‘아이 캔 스피크’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여기에는 여성의 고통을 전시하는 단 한 컷의 가학적 이미지도 없다. 대신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자생적으로 입체화하는데 에너지를 쏟는다. 아니, 옥분은 ‘위안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성숙한 여성이자 시민이다. 이런 점에서 ‘위안부’ 피해자로서의 과거가 영화의 중반부를 훨씬 지나 하나의 반전처럼 주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옥분은 구청 직원이 무서워하는 ‘민원 왕’으로, 재개발 건설업체와 맞서 이웃 시장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투사로, 영어 공부에 열심인 만학도 할머니로 먼저 다가온다. 이것의 효과는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제국주의의 폭력이나 민족공동체의 상흔을 상징하기에 앞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상을 디테일하게 살아가는 생활인이자, 우리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감내하는 성숙한 시민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를 희생자로 위로한다면서 도리어 그것을 예외적인 것으로 배제해 왔는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준다.
 
‘귀향’에 이어 ‘소녀들’의 비극에 집중한 ‘눈길’(2017·이나정 감독). [사진 각 영화사]

‘귀향’에 이어 ‘소녀들’의 비극에 집중한 ‘눈길’(2017·이나정 감독). [사진 각 영화사]

불행한 과거가 밝혀진 후에도 영화는 옥분이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에 저항한다.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미국 법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장면이 압권인 것은 단순히 일본의 억지 주장을 만천하에 고발한 승리의 기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병에 걸린 친구가 영어로 쓴 연설문을 만학도의 열정으로 익힌 발음으로 대신 읽어나갈 때, 회의장에 또박또박 울려 퍼지는 영어단어 하나하나의 활력은 고발 차원을 뛰어넘어 어떤 능동적인 연대의 장을 생생하게 구축한다. 이 영화의 감동은 과거의 불행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의 생활감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어느 여성 주체의 약동하는 삶의 의지, 성숙한 시민 의식, 능동적인 말 걸기에서 나온다.
 
뉴욕한인회관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뉴욕한인회관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개인적으로 ‘천만 영화’가 되길 바랐지만 400만 명을 넘기지는 못할 것 같다. ‘아이 캔 스피크’가 완벽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한국의 상업영화는 ‘위안부’ 문제를 재현할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소재의 영화는 이어질 것이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벌인 법정 투쟁을 모티브로 한 ‘허스토리’(가제, 민규동 감독) 등 실제로도 이미 몇 편은 제작에 들어갔다고 한다.
 
우리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폭력적인 이미지 없이도 충분히 공분을 일으킬 수 있고 비장한 톤이 아니어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위안부’는 기념해야 할 박제도 흥미로운 희생자도 아니다. 그전에 그녀들은 생활인이자 이웃이다. 이후의 영화들이 이 사실만큼은 유념했으면 한다.  
 
박우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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