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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성희의 어쩌다 꼰대(16) ‘되새김질 신공’과 ‘진행성 치매’의 뻔한 승부

중앙일보 2017.10.16 04:00
또 걸렸다. 아내의 ‘되새김 신공’에 대책 없이 밀려야 했다. 이야기인즉 이렇다. 
 

40년 전 군 시절 ‘여사친’ 편지 꼬투리잡는 아내
담배 집에 두고 집 밖으로 담배 피우러 나간 나
그날 오후 티타임은 나의 ‘의문의 1패’ 로 끝나

 
편지봉투. [사진 freeimages]

편지봉투. [사진 freeimages]

 
한가한 오후 차를 마시다가 편지가 화제에 올랐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은 연애편지 쓰는 젊은이들은 없다 등등으로, 제법 낭만적인 시작이었다. 아내가 내가 보냈던 편지를 지금도 어딘가에 간직하고 있다고, 나 역시 고등학교 이래 받은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 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한데 이 대목에서 아내의 연상은 내가 요즘 말로 여사친-그야말로 여자 사람 친구였다. 맹세한다-에게 받았던 ‘편지’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이사할 때 내가 그 문제의 편지를 보여주지 않아 섭섭했노라며 그 친구의 이름을 댔다.
 
일단은 놀랐다. 아니, 40년 전 군에 있을 때 우연히 만나 인간적으로 친해졌던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다니. 그리고 이삿짐을 싸면서 그 편지들을 놓고 아내와 내가 실랑이를 했다고?  

 
맞다. 내가 받은 편지들을 고이 간직했으니 그 여사친의 편지들도 ‘포괄적으로’ 어느 상자엔가 들어있긴 할 게다. 그렇지만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다. 행여 그것들을 다시 뒤적이며 ‘추억’에 젖은 일은 결단코 없었다. 놀라움에 이어 어지러움을 느낀 까닭이다.
 
 
손편지. [중앙포토]

손편지. [중앙포토]

 
 
아내의 놀라운 기억력 
 
아내는 다시 생각하니 열이 오르는지 생생한 기억을 보탰다. 이삿짐을 싸다가 편지뭉치들이 눈에 띄기에 그 친구의 것을 읽어보려 했단다. 그걸 내가 말렸다고, 그리고 그걸 소중하게 싸서 옮겨왔다고 했다. 아니, 나로서는 황당했다. 그런 실랑이도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그 편지함이 어디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해서 그랬다. 기분 풀라고, 그리고 원하면 이제라도 편지를 찾아서 읽어보라고. ‘백기’를 들었건만 아내의 공격은 계속됐다. “당시 마음 상할 대로 상했는데 이제 와서 읽어보면 뭐가 달라지겠냐”면서. 결국 그날 오후 티타임은 요즘 표현대로 하자면 나의 ‘의문의 1패’로 끝났다.
 
 
[강릉=연합뉴스] 강원 강릉시 경포해변을 찾은 관광객들이 느린 우체통에 추석 연휴의 추억을 남기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강릉=연합뉴스] 강원 강릉시 경포해변을 찾은 관광객들이 느린 우체통에 추석 연휴의 추억을 남기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게 모두 아내의 ‘되새김질’과 나의 ‘진행성 치매’가 빚어낸 공방이다. 아내는 그동안 맺힌 게 많았던지 예전 서운했던 일, 섭섭했던 기억을 시시때때로 꺼내 나를 타박한다. 거의 ‘신공’ 수준이다. 어찌 그리 세세하게 기억을 잘 하는지 놀라울 정도다. 
 
여기에 부인 또는 고함으로 맞설 수는 없으니 ‘팩트’로 공세를 무력화 해야 한다. 하지만 15층 아파트에서 담배를 피우러 내려갔는데 담배를 잊고 가는 ‘진행성 치매’이니 6하 원칙에 따른 아내의 공세를 반박할 도리가 없다.  
 
아, 어쩔꼬. 연하인 아내의 ‘진행성 치매’는 나보다 더딘 만큼, 승패가 분명한 이 ‘전투’는 쭉 계속될 듯하니.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jaejae99@hanmail.net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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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필진

[김성희의 천일서화] 책생책사(冊生冊死). 책을 읽고 기자를 꿈꿨고, 출판팀장으로 기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핵심은 ‘재미’였다. 공연히 무게 잡는 책은 싫기도 하고 읽어낼 깜냥도 못 되었으니.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책’ 이야기 또는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쓰려 한다.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듯한 아라비안나이트식 책 이야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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