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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헌재소장 대행체제의 위헌적 인식이 위험하다

중앙일보 2017.10.16 02:10 종합 34면 지면보기
1987년 6월 항쟁의 산물로 1988년 탄생한 헌법재판소는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서 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 보호, 헌법의 이념과 가치 수호, 권력 통제라는 설립 취지를 살려 우리의 정치적·사회적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유신헌법 시절 대통령 긴급조치 ‘위헌’, 수도 이전 ‘위헌’, 친일 재산 몰수 규정 ‘합헌’, 공무원시험 나이 제한과 호주제의 ‘헌법 불합치’ 등 헌재가 내린 결론은 우리 사회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다. 그 결정판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다. 그런 헌재의 존재에 힘입어 출범한 게 문재인 정권이고, 이른바 ‘촛불정신’이다.
 

‘대행 적법’ 주장은 헌법정신 훼손
헌재를 ‘헌재답게’ 만들 책무 있어

그래서 헌재의 위상과 권위를 흔들려는 어떠한 기도도 막아내는 것이 헌법적 가치이자 명령이다. 정치권력 등 외부 영향으로부터의 독립은 그 핵심이다. 특히 헌재소장 선임은 절차적 정당성이 담보돼야 하는 헌재 독립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이수 헌재소장 권한대행 체제를 보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은 문제가 있다. 문 대통령은 그제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통령은 헌재소장 권한대행을 지명하지 않고,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다”고 했다. 그는 “2017년 9월 18일 헌법재판관 전원이 김이수 재판관의 헌재소장 권한대행 계속 수행에 동의했다”며 김 권한대행의 지위가 합법적이라고 주장했다. ‘헌재소장 궐위 시 헌재 재판관 회의에서 권한대행을 선출한다’는 헌재법과 규칙에 따른 자신의 결정에는 하자가 없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면서 국회의 헌재 국감에서 벌어진 파행을 야당 탓으로 돌렸다.
 
파행의 원인은 문 대통령과 야당의 인식 차에 있다. 국회는 지난달 11일 야당 주도로 김 권한대행의 헌재소장 인준안을 부결시켰다. 일단 부적격자로 판단된 만큼 지명권자인 문 대통령은 조속히 후임 헌재소장 후보자를 찾는 게 순리였다. 그러나 청와대는 지난 10일 김 권한대행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임기인 내년 9월 19일까지 1년여를 이어가겠다는 심산인 듯하다. 문 대통령은 대행 체제를 언제까지 끌고 가겠다는 구체적인 시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에서도 ‘적법’과 ‘합법’만 강조할 뿐 언급을 피했다. 국회의 부결에 불만을 표시하는 불복의 의사이자 오기라는 인상마저 든다. 헌재소장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는 헌법정신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편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헌재소장과 이를 따르는 헌재가 정권의 눈치를 볼 개연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헌재가 독립성을 의심받는다면 그 존재 의의는 사라진다.
 
대통령은 헌법기관을 정당하게 구성해야 할 책무가 있다. 권한대행 체제는 국회 임명동의권을 무력화하고, 헌법정신의 실종을 초래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신임 헌재소장 후보자를 지명하겠다고 밝히면 모든 문제는 풀린다. 형식적인 법률 내용이 아니라 절차적 합리성과 정당성을 갖출 때 헌재가 헌재다워진다. 대통령의 헌법 수호 의무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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