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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외환위기 20주년, 채무불이행자의 20년

중앙일보 2017.10.16 01:00 경제 9면 지면보기
한애란 경제부 기자

한애란 경제부 기자

“그땐 연대보증 서달라고 하면 당연히 해주는 거로 알았어요. 내 또래엔 나 같은 사람 많을 겁니다.”
 
채무 불이행자로 살아온 20년 세월을 이야기하는 김지성(가명·59) 씨는 의외로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화를 낼 에너지조차 소진된 듯했다.
 
작은 수입업체 임원으로 일하던 김 씨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건 1997년 외환위기였다. 회사는 부도를 맞았고, 대표이사 부탁으로 1억2000만원을 연대보증 섰던 김 씨는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간신히 새 직장을 구했지만 이번엔 통장에 압류가 들어왔다. 100만원 월급을 받아도 쓸 수가 없었다. 월급 압류를 피하려니 취직은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일용직뿐이었다. 일용직은 매일 현찰로 일당을 주니 압류 걱정은 없다. 그렇게 줄곧 일용직으로 살아왔다.
 
때가 되면 우편물이 날라왔다. 빚의 소멸시효를 다시 연장한다는 통지였다. 세월이 흘러도 빚은 사라지기는커녕, 이자가 계속 불어나 원금보다 많아졌다.
 
개인파산이라는 제도가 있다고 해서 알아봤다. 파산관재인 선임 등에 비용이 150만원 넘게 들 거라는 말에 발길을 돌렸다. 하루하루 일당을 받아서 쓰기 바쁜 김 씨에겐 개인파산 절차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20년 동안 내가 능력이 있었으면 갚았겠지요. 채무 불이행자라 경제활동을 제대로 못 하니까 돈을 벌 수가 있나.”
 
얼마 전, 장기연체자 빚을 탕감해준다는 ‘주빌리은행’에 찾아갔다. 조회 결과 그의 은행 빚은 자산관리공사로 넘어갔고, 시효가 끝나지 않은 채 살아있다고 했다. 상담사는 연체금액이 너무 커서 지원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김 씨가 빚 수렁에서 빠져나올 길은 개인파산 말고는 없어 보인다. 정부도 1000만원 이하 장기소액연체 채권에 대해서만 채권조정을 해주겠다는 계획이다. ‘도덕적 해이’ 논란 때문에 정부로선 금액 기준을 높이기가 어렵다. 그래도 이렇게 질문을 던져봤다. 만약 그 빚이 싹 없어진다면 뭘 하고 싶으세요?
 
그는 답했다. “만약 빚이 없다면요? 내 명의 통장을 만들고 안정된 중소기업에 취직을 해야겠죠. 아니면 조그마한 식당을 하나 차려서 내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난 아직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어요.”
 
‘만약’을 이야기하며 한결 밝아진 그의 목소리가 왠지 더 슬픈, 외환위기 20주년이었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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