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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자의 미모맛집]31 육개장의 신세계를 만나다

중앙일보 2017.10.16 00:01
두툼한 구스다운 점퍼도 무용지물. 찬바람 매서운 어느해 1월, 제주 얘기다. 한라산 눈꽃 트레킹 취재를 위해 새벽같이 숙소를 나섰다. 차를 몰고 제주시 삼도동에 있는 식당 우진해장국(064-757-3393)으로 향했다. 오전 5시에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어서였다. 
제주산 고사리와 돼지고기로 푹 끓여낸 고사리해장국. 생김새는 호감이 가지 않지만 누구든 한 숟갈만 먹어보면 감탄하게 된다.

제주산 고사리와 돼지고기로 푹 끓여낸 고사리해장국. 생김새는 호감이 가지 않지만 누구든 한 숟갈만 먹어보면 감탄하게 된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우진해장국의 푸른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밝아보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복을 입은 남정네들이 조용히 숟가락을 뜨고 있었다. 더러는 소주잔을 기울였다. 밤 술자리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진 않았다. 육개장(8000원)을 주문했다. 평소 아침밥을 잘 먹지 않거니와 매운 국밥은 더더욱이나 꺼리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산을 타려면, 그냥 산도 아닌 눈덮인 한라산에서 하루종일 부대끼려면 속을 든든히 채워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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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펄 끓는 육개장이 턱 하고 테이블에 놓였다. 첫인상에 놀랐다. 지금껏 봐온 육개장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 때문이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아릴 정도의 빨간색이 아니라 거무튀튀한 국물이었다. 국이라기보다는 죽처럼 점성이 높은 것도 독특해보였다. 숟가락을 넣어 휘저었다. 고춧가루와 채 썬 쪽파, 깨가 국과 함께 버무러졌다. 강한 향이 올라왔다. 아주 묵직한 고기 냄새와 진한 고사리향이 어우러진 듯했다. 이른 아침, 전혀 입맛이 없었는데도 침이 고였다. 
펄펄 끓인 육개장 위에 채 썬 쪽파와 고춧가루, 참깨를 얹어준다.

펄펄 끓인 육개장 위에 채 썬 쪽파와 고춧가루, 참깨를 얹어준다.

뭍에서 먹는 매운맛이 강한 육개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사리와 돼지 육수가 기본인데다 점도가 높아 고기죽 같다.

뭍에서 먹는 매운맛이 강한 육개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사리와 돼지 육수가 기본인데다 점도가 높아 고기죽 같다.

첫 숟갈을 뜨고는 절반 정도는 밥을 말지 않고 그냥 먹었다. 찬찬히 맛을 음미했다기 보다는 연신 놀라며 숟갈을 떴다. 잘게 찢긴 돼지고기와 고기처럼 으깨진 고사리 맛은 서로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돼지 등뼈와 뒷다리 살을 넣고 푹 우려냈단다. 절반은 밥을 말아서 먹었다. 뚝배기를 깨끗이 비웠다. 미명에 이런 식으로 밥을 먹은 적이 있던가 싶었다. 보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몸이 후끈해졌다. 예열을 마친 기분이랄까. 힘차게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눈천지인 한라산 등반을 무사히 마쳤다. 
새벽녘에 육개장을 든든히 먹고 한라산 눈꽃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다. [중앙포토]

새벽녘에 육개장을 든든히 먹고 한라산 눈꽃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다. [중앙포토]

한라산의 눈부신 설경도 기억에 남았지만 고사리해장국의 맛이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이후 제주를 갈 일이 있으면 일종의 의례처럼 렌터카를 몰고 삼도동으로 향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한라산이 비치면 군침이 돌기도 했다.
늘 육개장만 먹다가 몸국(8000원)을 먹은 날도 기억난다. 몸국은 돼지 사골 우린 육수에 해초인 모자반을 넣고 푹 끓여 먹는 제주 향토음식이다. 우진해장국은 고사리육개장으로 유명한 집이기에 몸국에는 눈길도 안 줬는데 이 집 몸국도 꽤 소문이 났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뚝배기에 담겨 나온 몸국의 형체는 푸릇한 색이 도는 것 말고는 육개장과 비슷했다. 은근히 올라오는 냄새는 미역국과 비슷하면서도 진한 돼지고기 향이 섞여 있었다. 국물이 입에 들어간 순간 육개장을 한 숟갈 떴을 때처럼 감탄이 절로 나왔다. 미역·다시마·톳 등 세상의 해초를 모두 머금은 것처럼 개운한 맛이 강하게 밀려왔다. 모자반이 톡톡 씹히는 식감도 별미였다. 잘게 다진 오징어젓갈, 부추김치와의 궁합도 훌륭했다.
모자반을 듬뿍 넣은 몸국은 제주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다. 우진해장국에선 고사리육개장처럼 돼지고기 육수를 기본으로 한다.

모자반을 듬뿍 넣은 몸국은 제주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다. 우진해장국에선 고사리육개장처럼 돼지고기 육수를 기본으로 한다.

우진해장국의 몸국을 맛본 뒤 몸국 예찬가가 되었다. 제주에서 유명하다는 몸국 전문식당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다녔다. 조금씩 다른 맛을 즐기는 것도 즐거웠다. 어느 집은 배추를 넣었고, 또 다른 집은 양파를 듬뿍 넣어 단맛이 강했다. 순댓국처럼 들깨가루를 넣은 집도 있었다. 
몸국 순례를 해보니 솔직히 우진해장국의 몸국이 최고는 아니었다. 그러나 육개장과 몸국을 함께 맛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일행이 있으면 꼭 이 집을 찾는다.
얼마 전부터 우진해장국은 택배를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육개장과 몸국을 서울 집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냉장고에 가득 쟁여놨다. 틈틈이 얼어있는 국을 녹여 끓여 먹지만 역시나 식당에서 먹을 때와 같은 맛은 아니다. 그래서 다시 제주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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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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