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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세 학생, 69세가 반장 … 받아쓰기 시험도 즐거워요

중앙일보 2017.10.12 01:16 종합 14면 지면보기
지난달 29일 서울 구로구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이 한글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 보건복지부]

지난달 29일 서울 구로구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이 한글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 보건복지부]

“‘발레’가 뭘까요?” “예쁜 옷 입고 춤추는 거요!” 단어의 뜻을 묻는 강사의 질문에 한 학생이 손짓으로 발레 동작을 흉내 내며 대답한다. 칠판에 적힌 ‘발레’ 두 글자에서 자음 ‘ㅂ’의 위치를 묻자 “앞에요!” “맨 앞에!”라는 답이 쏟아진다. 유치원 교실의 모습이 아니다. 예순을 훌쩍 넘긴 어르신들이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한글교실이다.
 

구로 노인복지관 20년째 한글교실
초급반 45명 정원 꽉 차 대기자도

지난달 29일 오전 9시30분 서울 구로구 노인종합복지관. 어르신 31명이 한글교실 초급반 수업에 열중이다. 꼬불꼬불 파마머리를 한 할머니들이다. 이날은 ㅂ·ㅃ·ㅍ 등 자음 활용을 배우는 시간이다. ‘발레’와 ‘빨래’, ‘빠르다’와 ‘파릇하다’ 등 헷갈리기 쉬운 단어가 칠판에 가득하다. 강사가 한글 자모의 조합, 단어의 뜻과 활용을 정확하게 짚어준다. 졸거나 딴짓을 하는 학생이 없다. 곱게 깎은 나무 연필을 쥐고 이면지 연습장에 열심히 글을 옮겨 적는다.
 
구로구 노인종합복지관은 1997년 개관 이후 거의 거르지 않고 주 1회 어르신 한글교실을 열어 왔다. 지역사회 기부활동의 일환이다. 2015년 한국평생교육진흥원의 성인문해교육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주 2회 수업으로 늘었다. 5~11월 800만원을 지원받아 강사료를 지급하고 백일장 나들이 행사 등을 주최한다. 학생들은 수업료·교재비를 내지 않는다.
 
한글교실 초급반은 45명 정원이 찼고 대기자가 7명이다. 중급반(정원 54명)에는 48명이 등록했다. 한 해 100명 내외 학생이 수업을 받는데, 여러 해 등록한 경우도 있다.
 
4년째 수업을 진행하는 강사 안해숙(38)씨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읽을 줄은 알지만 원리를 모른다. 평생 배움의 한을 간직해 온 어르신들이 한글과 한국어 규칙을 하나씩 깨우치고 활용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글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남짓 된 이복남(82) 할머니는 “돌아서면 까먹는 게 많지만 배우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읽을 줄 모르던 어르신의 기쁨은 더 크다. “길거리 다니면서 간판 하나도 못 읽는 까막눈이었어요. 이제는 은행에 가서도, 지하철을 탈 때에도 글을 직접 읽을 수 있어 정말 편해요.” 맨 앞줄에서 큰 목소리로 답을 하던 박모 할머니는 “한글교실에 다니고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며 활짝 웃는다.
 
수업이 끝날 무렵 받아쓰기 시험 결과를 받았다. 100점부터 40점까지 제각각이다. 할머니들은 옆자리 친구와 점수 얘기를 하며 소녀처럼 수다를 떨었다. 강사 안씨는 “어떤 할머니는 받아쓰기 시험을 잘 보고 나서 더 열심히 배우려고 의욕을 보인다”며 “초등학교 학력인증을 받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장 정경임(69)씨가 수업 후 강사에게 이런 인사를 건넨다. “맹인을 눈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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