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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암호화폐, 자본이 되지 못한 설움

중앙일보 2017.10.12 01:00 경제 9면 지면보기
김도년 산업부 기자

김도년 산업부 기자

읽다 포기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펼쳐 든 건 장안의 화제 ‘암호화폐’(가상화폐) 때문이다. 여기에 투자해 낡은 세탁기를 바꿨다는 이, 해킹 사고로 암호화폐 거래소에 맡긴 돈을 몽땅 잃었다는 이를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됐다.
 
디지털 암호일 뿐인 암호화폐는 어떻게 하루에만 수조원씩 거래되는 존재가 된 걸까. 150년 전 마르크스가 던진 질문도 비슷했다. 그는 금이 종잇조각에 불과한 지폐로 대체된 이유로 “화폐가 상품과 교환되는 ‘유통수단’일 뿐이라면, 상징적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 썼다. 우리는 월급이 순식간에 카드빚과 아파트 대출로 교환되고, 잔액조회로 찍히는 ‘상징적 숫자’만으로 주머니 사정을 훤히 알 수 있게 됐다. 이미 ‘가상화한 한국은행권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 화폐의 재산권을 보호해 줄 수단은 오직 ‘보안성’이다. 한국은행권은 누가 더 해킹으로부터 안전한지, 블록체인 기술로 무장한 암호화폐들과 경쟁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성장하는 암호화폐 시장을 일종의 도박장으로 여기는 듯하다. 지난달 29일 금융위원회·기획재정부 등 범 정부기관이 모여 암호화폐 거래업을 유사수신 행위로 규제하겠다고 밝힌 것만 봐도 그렇다. 특히 이윤 추구가 가능한 대출·자금 조달 행위(ICO)를 금지한 것은 암호화폐가 ‘자본(Capital)’ 행세를 하는 건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다. 한 정부기관 관계자는 “가상화폐 거래업자들은 모두 도박범으로 잡아가야 하지만, 신기술 진화의 싹을 잘라선 안 된다는 의견도 많으니 지켜보자는 것일 뿐”이라고 속내를 전했다.
 
시장은 빠르게 변한다. 국내 최대 거래소 빗썸은 회계감사를 받은 재무제표에다 암호화폐를 유동자산으로 분류했다. 1년 내 현금으로 바꿀 수 있고 미래 수익 추구가 가능한 엄연한 자산으로 본 것이다. 넥슨의 지주사 NXC가 연 매출 7억원짜리 암호화폐 거래소 코빗을 912억원에 인수한 것, 디즈니가 암호화폐로 자금조달에 나선 것도 암호화폐의 진화를 보여주는 현실들이다.
 
물론 암호화폐 투자금이 생산적 활동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주장, 신기루가 꺼지면 피해자를 양산할 것이란 정부의 우려도 공감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기존엔 못보던 현상을 규제하려고만 드는 태도가 어쩌면 해커로부터 모든 이의 재산권을 지켜줄 지도 모를 암호화폐 개발자들의 의지를 가로막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줬으면 한다. 
 
김도년 산업부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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