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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법 '빨갱이 낙인'에 49년간 망가진 70대 납북어부의 인생

중앙일보 2017.10.11 18:01
지난달 29일 전주지법 2호 법정에서 열린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박춘환씨(왼쪽 세 번째)와 납북어민 유족 등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지난달 29일 전주지법 2호 법정에서 열린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박춘환씨(왼쪽 세 번째)와 납북어민 유족 등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나는 '박춘환'이란 늙은이오. 올해 71살 먹었소.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하오. 얘기가 두서 없더라도 이해해 주오.
 

1968년 조기 잡다 납북된 어민 박춘환씨
5개월 억류 후 귀환했지만 억울한 옥살이
처음엔 어로저지선 넘었다며 징역 8개월
출소 후 경찰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
간첩 혐의로 7년 복역…고향 군산 떠나
2011년 국보법 사건 재심서 무죄 받아
지난달 수산업법 재심서 두 번째 무죄
박씨 "정부 야속. 일찍 누명 벗었더라면"

내 고향은 전북 군산시 옥도면 개야도라오. 49년 전에는 전북 옥구군 미면 개야도리였소. 나는 7남매 중 장남이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는 다니지 못했소. 자연히 한글을 읽거나 쓰지도 못했다오. 대신 15살 때부터 바다에서 배를 탔소. 22살이던 1968년 1월부터는 '영창호'에서 선원 생활을 했소. 나이는 어렸지만 그 무렵 이미 아내도 봤다오.  
 
그런데 결혼하고 한 달 만인 1968년 5월 말 사달이 났소. '영창호'를 타고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기를 잡다 북한 경비정에 납치된 것이오. 다섯 달 만인 그해 11월 고향에 돌아왔지만 내 삶은 이미 꼬여 있었소. '납북어부'라는 꼬리표가 붙은 거요.  
지난달 29일 전주지법 2호 법정에서 열린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박춘환씨. 전주=김준희 기자

지난달 29일 전주지법 2호 법정에서 열린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박춘환씨. 전주=김준희 기자

 
이 일로 난 전주지법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1969년 8월 만기 출소했소. 내가 지은 죄는 반공법 위반과 수산업법 위반죄요. 교도소에서 나가면 새 삶을 꾸릴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모두 착각이었소. 국가보안법이라는 더 '무서운 덫'이 기다리고 었었던 게요.
 
나는 1969년 12월부터 1971년 10월까지 9차례에 걸쳐 내 또래인 유모(71)씨와 임모(70)씨 등 10명에게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고무·찬양하고, 1969년 12월과 1970년 9월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하는 간첩 행위를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및 반공법 위반) 등으로 기소돼 1972년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소. 광주고법에 항소하고,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모두 기각돼 꼬박 7년을 옥살이를 하다 나왔소.  
 
당시 경찰과 검찰이 날 재판에 넘기며 작성한 공소 사실만 보면 난 영락없는 간첩, 그러니까 '빨갱이'요. 내가 동네 주민과 동료 선원들에게 했다는 말의 일부는 이렇소.
 '(북한) 해주항에 도착하니 우리들을 환영해 주고 소독을 하고 목욕과 이발을 시켜줬다' '평양여관에 있을 때 매일같이 쌀밥에 쇠고기 등의 반찬과 인삼주로 대우를 잘 받았다' '평양방직공장에서는 처녀들이 우리를 환영해 줬다' '이북에는 못 사는 사람이 없고 평등하다' '북조선에서는 남조선 인민을 위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 '70년대는 남조선을 밀고 내려와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킨다' 등이오.
지난달 29일 전주지법 2호 법정에서 열린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박춘환씨(맨 왼쪽)와 납북어부 유족들. 전주=김준희 기자

지난달 29일 전주지법 2호 법정에서 열린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박춘환씨(맨 왼쪽)와 납북어부 유족들. 전주=김준희 기자

 
모두 조작된 내용이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경찰관들이 밤낮으로 두들겨 패면서 '너 간첩 맞지'라고 하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었소.  
 
경찰은 1972년 1월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상태에서 27일 이상 날 가두고 수사를 했소. 군산경찰서 경찰관들은 밤에는 여인숙에서 묵게 하고 낮에는 지하 조사실에서 날 마구 때리거나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별의별 고문을 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오. 보안대가 있는 전주와 서울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소.
 
제일 힘들었던 건 전기고문이오. 맞는 건 하도 맞으니까 무뎌졌는데 양쪽 손과 발가락에다 하는 전기고문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오. 손발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 입에 고춧가루 섞은 물을 붓는 고문도 참기 어려웠소.
박춘환씨가 40여 년 전 경찰이 가한 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박춘환씨가 40여 년 전 경찰이 가한 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그때 고문 때문에 양쪽 어깨가 부서졌소. 양쪽 엉덩이엔 철심을 박았지요. 경찰관들한테 하도 두들겨 맞아 뼈가 금이 갔기 때문이오. 지금도 걸음을 제대로 못 걷는 이유요.
 
내가 고문에 못 이겨 내뱉은 거짓말 때문에 친구였던 유씨와 임씨가 억울하게 징역 8개월을 산 것은 두고두고 미안하오. 그들은 내가 북한이 보낸 간첩인 줄 알면서도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았다는 죄를 뒤집어썼소.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왔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소. 동네 사람들은 북한에 갔다왔다고 손가락질하고 친구들은 말조차 붙여주지 않았다오. 한편으론 이해도 갔소. 나와 같이 있다간 간첩으로 몰려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던 엄혹한 시절이었으니….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까지 '간첩의 자식' 소리를 들으며 피해를 보는 건 못 참겠습디다. 생계도 막막했소.
 
박춘환씨가 40여 년 전 경찰이 가한 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박춘환씨가 40여 년 전 경찰이 가한 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주=김준희 기자

도저히 살 수 없어 1980년 무렵 고향을 떠나 아무 연고도 없는 충남 연기군으로 이사갔소. 물도 배도 안 보이는 데서 살고 싶어 산골짜기를 고른 거요. 바다를 보면 고향에서 겪은 나쁜 일들이 떠오를까봐 그랬다면 과장일까. 고문 후유증으로 성치 않은 몸으로 여기저기 노가대도 뛰고 농사도 지으며 악착같이 살았소.   
 
희망이 싹튼 건 2009년 4월이오.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군산경찰서의 불법 구금 및 가혹 행위에 의한 수사로 청구인들이 범죄 사실을 허위 자백했고 그런 수사에 기초해 공소가 제기되고 판결이 확정됐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오.
 
나는 이 결정에 용기를 얻어 7년간 징역을 살게 한 간첩 혐의 등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고, 2010년 6월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무죄를 선고했소. 그리고 2011년 3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된다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를 고문하고 간첩 누명을 씌운 경찰관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소. 내가 경찰 조사를 받은 1972년으로부터 37년 이상이 지나 직권남용체포죄·직권남용감금죄·독직폭행죄 등의 공소시효가 모두 완성됐기 때문이라는 게 1심 법원의 설명이라오. 지금이라도 그들을 만나면 솔직히 다 죽이고 싶소. 하지만 공교롭게도 날 고문하고 취조했던 경찰관 12명은 이미 모두 죽었다오.  
 
1968년 태양호를 선두로 납북되었던 배 14척이 인천 월미도 앞에 도착, 푸른 작업복을 입은 어부들이 기뻐하고 있다. [중앙포토]

1968년 태양호를 선두로 납북되었던 배 14척이 인천 월미도 앞에 도착, 푸른 작업복을 입은 어부들이 기뻐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달 29일 전북 전주시 덕진동 전주지법 2호 법정에서 열린 또 다른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소. 피고인 한 사람이 두 번의 재심에서 연거푸 무죄를 선고받은 건 매우 드물다고 하오.  
 
전주지법 형사1부는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8개월을 산 나를 포함한 납북어부 3명에 대한 재심에서 모두 '죄가 없다'고 판단했소. 1968년 납북됐던 '영창호' 선장 오경태씨와 선원 허태근씨는 이미 숨져 오씨의 딸 정애(52)씨와 허씨의 아내 문선임(71·여)씨가 대신 법정에 나왔다오.  
 
재판장인 장찬 부장판사는 무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디다. "당시 유죄의 근거로 삼았던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이나 검찰 및 경찰의 피의자 신문 조서 등이 불법 구금 등 가혹 행위로 받아냈기 때문에 증거 능력이 없다"고요. 당시 오경태씨는 선장이라는 이유로 선원인 나와 허씨보다 형이 무거운 징역 1년6개월을 교도소에서 보냈소. 당시 '영창호' 선원 7명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은 나와 지금도 개야도에 사는 정모씨 둘뿐이라오.
 
오씨의 딸 정애씨가 재판이 끝난 뒤 "어렸을 때 검정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집 앞을 서성거렸고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항상 누워 계셨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하셨다"며 울먹일 때 나도 속으로 울었소. 나 역시 아들에게 미안해서요.
 
1967년 납북됐다 귀환한 어부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1967년 납북됐다 귀환한 어부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북에 납치된 하나의 행위를 두고 당시 수사기관이 북에 넘어간 것은 반공법 위반, 어로저지선을 넘어간 것은 수산업법 위반 등 두 가지 혐의를 적용해 옥살이를 시킨 것은 너무 가혹하면서도 우스운 일 같소.
 
내 변론을 맡은 이명춘 변호사는 이렇게 말합디다. "당시 북한은 남한의 어부를 납치해 교육을 시켜 다시 내려보내는 게 정책이었다"고요. 1960년대 후반부터 10년 사이 1500명 정도의 '납북어부'가 나처럼 처벌받았다 하오. 그런데 지금까지 무죄를 받은 사람은 고작 10명도 안 된다니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이 변호사의 말이 실감이 가오.  
 
이 변호사는 한발 더 나가오. "당시 정부가 휴전협정을 위반한 북한의 불법엔 눈 감고, 북에 의해 강제로 어로저지선을 넘어간 우리 국민들만 박살 내는 재판을 했다"는 발언이오.  
 
나 역시 정부가 참 야속하다고 생각하오. 겨우 먹고 살겠다고 배를 탄 것뿐인때 애먼 사람을 잡아 두들겨 패서 간첩을 만들고 징역을 살리는 게 말이 되오. 부모와 형제·친척까지도 살지 못하게 했으니 원망이 클 수밖에요. 지금이니까 이렇게 말 한마디라도 하지 그때는 이런 표현도 못했소.  
 
전북 전주시 덕진동 전주지방법원 전경. [중앙포토]

전북 전주시 덕진동 전주지방법원 전경. [중앙포토]

49년 만에 완전히 '간첩 누명'을 벗던 날, 기자 양반들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소. 일흔이 넘긴 나이에 뭘 하겠소. 죽을 때까지 편히 있다 가면 그만이오. 고향도 가고 싶지 않소. 아무리 무죄를 받았어도 고향에 가야 친구들도 반가워하지 않을 터.
 
이 변호사는 "형사보상과 국가배상을 진행하겠다"고 하오. 금전적 배상이 전부일까. 너무 늦었다는 생각뿐이오. 나이를 먹은 게 억울하오. 진작 무죄를 받았으면 내가 할 일을 했을 텐테….  
 
※이 기사는 지난달 29일 전주지법에서 열린 박춘환씨 등 납북어부 3명에 대한 재심 재판을 지켜본 뒤 박씨와 이명춘 변호사 등의 인터뷰와 기존 재심 판결문 등을 참고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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