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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에 한글학교, "맹인을 눈뜨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중앙일보 2017.10.11 17:22
지난달 29일 오전 구로구 노인종합복지관 2층의 교실에서 어르신 한글교실 초급반 수업이 진행됐다. 이날 출석한 31명의 수강생들은 선생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며 활기찬 수업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진 보건복지부]

지난달 29일 오전 구로구 노인종합복지관 2층의 교실에서 어르신 한글교실 초급반 수업이 진행됐다. 이날 출석한 31명의 수강생들은 선생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며 활기찬 수업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진 보건복지부]

“‘발레’가 뭘까요?”

“예쁜 옷 입고 춤 추는 거요!”

 
단어의 뜻을 묻는 강사의 질문에 한 학생이 손짓으로 발레 동작을 흉내내며 대답한다. 칠판에 적힌 ‘발레’ 두 글자에서 자음 ‘ㅂ’의 위치를 묻자 “앞에요!” “맨 앞에!”라는 답이 쏟아진다. 유치원 교실의 모습이 아니다. 예순을 훌쩍 넘긴 어르신들이 뒤늦게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한글교실이다.  

구로 노인복지관, 어르신 한글학교 가보니
20년째 어르신 한글교실 운영
교육기회 놓친 어르신 위한 무료 나눔활동
초급반에 정원 45명 가득 차…대기자도 7명
돋보기 안경, 나무 연필 들고 와 '열공'
"돌아서면 까먹어도 배운다는 사실이 기뻐"
"한글교실로 까막눈 탈출…은행 갈 때 편해"
초등학교 학력인증 시스템 도입 검토 중

 
지난달 29일 오전 9시 30분 서울 구로구 노인종합복지관. 어르신 31명이 한글교실 초급반 수업에 열중이다. 꼬불꼬불 파마머리를 한 할머니들이다. 책상마다 돋보기 안경이 놓여있다.
 
한 수강생이 교과서의 문장을 연습장에 받아적고 있다. 한글교실을 찾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샤프나 펜이 아닌 나무 연필을 사용했다. 필통 안에는 돋보기 안경이 보인다. [사진 보건복지부]

한 수강생이 교과서의 문장을 연습장에 받아적고 있다. 한글교실을 찾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샤프나 펜이 아닌 나무 연필을 사용했다. 필통 안에는 돋보기 안경이 보인다. [사진 보건복지부]

 이날은 ㅂ·ㅃ·ㅍ 등 자음 활용을 배우는 시간이다. ‘발레’와 ‘빨래’, ‘빠르다’와 ‘파릇하다’ 등 헷갈리기 쉬운 단어가 칠판에 가득하다. 강사가 한글 자모의 조합, 단어의 뜻과 활용을 정확하게 짚어준다. 졸거나 딴짓을 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다. 곱게 깎은 나무 연필을 쥐고 이면지 연습장에 열심히 글을 옮겨 적는다.
 
 구로구 노인종합복지관은 1997년 개관 이후 거의 거르지 않고 주 1회 어르신 한글교실을 열어 왔다. 수업료는 없다. 2015년부터는 한국평생교육진흥원의 성인문해교육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보조금을 받게 됐다. 보조금이 나오는 7개월간(5월~11월)은 수업이 주 2회로 늘어났다. 지원금은 총 800만원으로 강사료와 백일장 나들이 행사 비용 등으로 쓰인다. 이전에는 교과서를 복지관에서 직접 구매했지만 지원을 받는 기간에는 교재도 제공된다. 한글교실은 복지관의 다른 문화수업에 비해 인기가 높은 편이다. 초급반은 45명 정원이 가득 찼고 대기자가 7명이다. 중급반(정원 54명)에는 48명이 등록했다.  
 
빈 자리가 없이 가득 찬 한글교실 풍경. [사진 보건복지부]

빈 자리가 없이 가득 찬 한글교실 풍경. [사진 보건복지부]

 4년째 수업을 진행하는 강사 안혜숙(38)씨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읽을 줄은 알지만 원리를 모른다. 평생 배움의 한을 간직해 온 어르신들이 한글과 한국어 규칙을 하나씩 깨우치고 활용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글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남짓 된 이복남(82) 할머니는 “요즘 자꾸 기억이 깜빡깜빡 하니까 손주가 머리를 쓰고 친구를 만나라고 수업을 신청해줬다”며 “돌아서면 까먹는 게 많지만 배우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비읍, 쌍비읍, 피읖이 들어간 단어를 익히고 있는 수강생. 이날 배운 내용은 다음 수업 받아쓰기 범위가 된다. [사진 보건복지부]

비읍, 쌍비읍, 피읖이 들어간 단어를 익히고 있는 수강생. 이날 배운 내용은 다음 수업 받아쓰기 범위가 된다. [사진 보건복지부]

 읽을 줄 모르던 어르신의 기쁨은 더 크다. 
 “길거리 다니면서 간판 하나도 못 읽는 까막눈이었어요. 이제는 은행에 가서도, 지하철을 탈 때에도 글을 직접 읽을 수 있어서 정말 편해요.”
 교실 맨 앞 줄에 앉아 큰 목소리로 질문에 답을 하던 박모 할머니는 "한글교실에 다니고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며 활짝 웃는다. 박 씨는 한글교실을 4년째 다니고 있다.
 
 수업이 끝날 무렵 학생들은 받아쓰기 시험 결과를 받았다. 100점부터 40점까지 제각각이다. 채점한 시험지를 돌려받은 할머니들은 옆자리 친구와 점수 얘기를 하며 소녀처럼 수다를 떨었다. 강사 안씨는 “어떤 할머니는 받아쓰기 시험을 잘 보고 나서 더 열심히 배우려고 의욕을 보인다”며 “초등학교 학력인증을 받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 씨와 함께 3년 동안 한글 공부를 해 온 반장 정경임(69)씨가 수업 후 강사에게 이런 인사를 건넨다. “맹인을 눈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재능을 가진 이가 이웃에 헌신하며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나눔문화 확산을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구로구의 어르신 한글교실은 일상 속 작은 나눔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바꿔가는 모습을 모여준 좋은 사례라고 본다. 봉사와 나눔의 문화가 살아 숨쉬는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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