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정호의 시시각각] ‘빨간 깜빡이’와 미국의 억지

중앙일보 2017.10.11 01:47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한창 뜨거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논란엔 황당한 구석이 꽤 있다. 압권은 “불공정 무역 탓에 한국에서 미국 차가 안 팔린다”는 주장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미 자동차 업체들이 한국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뒤집으면 “지금 미 업체들은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얘기다.
 

“불공정 무역으로 미국 차 안 팔린다” 주장
자율수출규제 요구 시 외부에서 대응해야

차 몰고 강남 나가 보라. 전후좌우 죄다 수입차다. 폴크스바겐이 ‘디젤 게이트’로 주춤해도 올 들어 8월까지 등록된 수입차는 전체의 15.2%. 역대 최고(2015년 15.5%) 수준이다. 폴크스바겐이 회복하면 20% 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런 판에 수입차 불공정 대우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혈맹인 미국의 차만 골라 골탕 먹일 리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도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 정부의 교묘한 훼방으로 미국 차가 안 팔린다”고 우긴다. 하지만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불공정 규정이라고 지목하는 것들을 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자동차 관련 USTR의 요구는 다섯 개. 당장 들어줘도 대세에 지장 없을 것들이다. “미국처럼 자동차 깜빡이를 노란색 외에 빨간색도 허용해 달라” “국내 수리 업체에 대한 교육 의무를 없애 달라”는 등이다. 외국에서 장사하려면 규정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들이 맞춰야 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이런 일방주의적 태도를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한·미 FTA 협상에 나선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USTR 대표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자부심이 강한 그는 협상 때 자신의 논리를 거칠게 밀어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1984년에는 USTR 부대표로서 서울·워싱턴을 오가며 철강 ‘자율수출규제(VER)’ 협상을 마무리했다. 당시 맞상대였던 김철수 전 상공부 장관은 그의 성품을 드러내는 비화를 들려줬다.
 
당시 워싱턴 막바지 협상에서는 미국 내 한국산 철강 물량을 전체의 몇 %로 할지가 최종 쟁점이었다. 한국은 2% 이상, 미국은 1.6%를 고집해 타결이 안 됐다. 회의 후 김 전 장관이 호텔로 돌아왔는데 라이트하이저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밤 캘리포니아로 떠나니 우리 요구를 받든지 이걸로 협상을 완전히 깨자”는 위협이었다. 한국 측은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고심 끝에 한국 협상팀은 모든 캘리포니아행 항공편의 승객 명단을 체크했다. 워싱턴을 떠난다는 말의 진위를 확인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이름이 어디에도 없음을 알게 된 협상팀은 끝까지 버틴 끝에 다음날 2.0%로 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처럼 허풍과 위협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성향을 아는 이들은 라이트하이저가 이번에도 자율수출규제로 몰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럴 경우 우리 자동차 수출이 줄뿐더러 자율수출규제를 금지한 우루과이라운드 원칙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한편에선 한·미 FTA를 깰 각오로 세게 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러 모로 득이 되는 시스템을 아예 없애 버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차라리 통상 밖 분야에서 문제를 푸는 게 슬기롭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예컨대 이래저래 북한 위협이 더 커지는 판이니 무기라도 더 사들여 미국을 달래 보자는 얘기다. 아니면 “북한의 위협 앞에서 동맹을 흔들면 안 된다”는 미국 내 한국 옹호론자나 FTA가 깨지면 큰 손해를 볼 수출업자들의 도움을 호소하는 것도 방법이다. 억지인 줄 알면서도 때로는 여기에 맞춰 대응해야 하는 게 ‘강자의 논리’가 통하는 국제사회인 것이다. 
 
남정호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