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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큰 사람들 편만 드는 세상, 억울하셨죠?

중앙일보 2017.10.10 01:00 종합 24면 지면보기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편 공원에 앉은 고수희 배우.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 연습을 위해 두 달 동안 매일 온 곳이다. 그는 “나에게 연기 연습은 다른 사람을 많이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편 공원에 앉은 고수희 배우.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 연습을 위해 두 달 동안 매일 온 곳이다. 그는 “나에게 연기 연습은 다른 사람을 많이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배우 고수희(41)는 신스틸러다. 잠깐 등장해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마녀와 ‘써니’의 장미, ‘괴물’의 간호사와 ‘타짜’의 송마담 등 그는 비중 작은 배역이라도 잊을 수 없는 캐릭터로 소화해내는 능력을 가졌다. 심지어 최근엔 TV 예능프로그램 ‘섬총사’(tvN)에서도 함께 출연한 김희선·강호동에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 주연 고수희
을끼리 싸우는 찌질한 현실 풍자
‘친절한 금자씨’ 마녀 등 신스틸러

덩치 큰 옆집 언니도 연애는 하듯
멜로 연기에 꼭 도전해보고 싶어

그의 연기 내공이 가장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은 연극 무대다. 1999년 ‘청춘예찬’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늘 그는 무대의 중심 인물이었다. 오는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하는 서울시극단의 신작 ‘옥상 밭 고추는 왜’(장우재 극본, 김광보 연출)에서도 주인공 현자 역으로 출연한다. 이기적이고 무례한 64세 현자씨. 빌라 옥상 텃밭의 고추를 주인 허락도 없이 싹쓸이하듯 몽땅 따가고는 도리어 욕을 퍼붓는 인물이다. 누가 봐도 나빠 보여야 할 현자를 “관객들한테 공감을 얻도록 연기하겠다”는 배우 고수희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8월 중순부터 매일 여덟 시간씩 연습하며 현자로 살고 있는 공간이다.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 연습 모습. [사진 서울시극단]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 연습 모습. [사진 서울시극단]

#“연기 잘하는 배우가 꿈”=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는 약자끼리 공격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 ‘찌질한’ 현실을 풍자한다. 현자와 대척점에 선 인물은 33세 무명 배우 현태다. 현자의 폭력적인 언행에 분통을 터뜨린다.
 
고수희는 “내 연기가 드세고 못된 아줌마처럼 보이는 데 머무를까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흔한 권선징악이 돼버릴까 두렵다”는 것이다. 그가 해석한 현자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다. “현자의 대사 중 ‘왜 목소리 높은 사람들 편만 들어주나’는 대목이 있다. 현자의 답답한 마음이 확 느껴졌다. 관객들도 그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현자에 완전히 동화됐다. “못돼 보이게 연기하지 말아야지 했다가도 상대 배우가 흥분하면 나도 모르게 못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감정 조절이 힘들다”고 털어놨다. 그는 “모든 배역은 비중이 크든 작든 다 주인공”이라며 “극중 역할에 자신을 담으려고 하는 게 배우의 습성”이라고 했다. 그가 입체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은 현자는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의 꿈은 “연기 잘하는 배우”다. 소박하고 원대하다. 롤모델을 묻자 올 2월 폐암으로 별세한 고 김지영 배우를 들었다. 이유는 “연기를 제일 잘하신 것 같아서”다.
 
영화 ‘타짜’의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타짜’의 한 장면. [중앙포토]

#데뷔부터 행운의 연속=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연극에 익숙했다. “여덟살 터울인 언니가 고려대 극회 활동을 했다. 집에서 언니가 연습할 때마다 내가 대본을 보며 상대역을 연기했다. 집이 대학로 옆 동소문동이어서 연극도 자주 보러갔다”고 했다. 하지만 연기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교(안양예고)와 대학(대구과학대)에서 모두 연기를 전공했지만, 그에 말에 따르면 “그냥 성적에 맞춰 진학했을 뿐”이었다. 대학 졸업 후엔 여행사·이벤트 회사 등에 취업했다. 그런데 번번이 급여도 제대로 못받는 일이 반복되더니 급기야 IMF 외환위기까지 닥쳐 직장을 잃고 말았다. 그의 젊은 날 고생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1998년 “집에서 가까운 대학로로 아르바이트 삼아 일하러 간 극단 동숭무대”가 그의 인생에 새 길을 열어줬다.
 
“처음엔 음향 보조일을 시켰던 박근형 연출자가 ‘너 감각 있다’며 창작극 주인공을 하라고 했다”는 게 시작이다. 그렇게 연극 ‘청춘예찬’(1999)으로 데뷔한 이후 일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청춘예찬’ 공연을 보러온 봉준호 영화감독이 자신의 첫 작품 ‘플란다스의 개’(2000)에 그를 캐스팅했고, 영화를 본 운군일 SBS 드라마 PD가 그를 일일드라마 ‘자꾸만 보고 싶네’(2000)에 출연시킨 것이다.
 
#“멜로 연기 하고 싶다”=이후 그는 연극·영화·드라마를 넘나드는 연기파 배우로 자리잡았다.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로 동아연극상 연기상(2006)을 받았고, 2008년엔 한일 합작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으로 요미우리 연극상 여자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데뷔 이후 줄곧 탄탄대로를 걸어오며 “흔히 말하는 배고픈 연극배우의 고충은 모른다”고 했지만, 슬럼프조차 없었던 건 아니다. 그의 얼굴을 대중에게 알린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 이후 3~4년을 그는 힘들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한동안 극악스러운 역할만 들어왔다. 뚱뚱해서 바보같이 그려지거나 덩치가 커서 억세 보이는 역할은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여럿이다. 연출도 직접 해보고 싶어 2012년엔 15분짜리 단편영화 ‘옥빛 슬픔’을 제작하기도 했다. 멜로 연기에도 꼭 도전하고 싶다. 그는 “키 크고 뚱뚱한 옆집 언니도 사랑을 할 거 아니냐”면서 “그렇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얘기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g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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