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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종이의 숨결, 창조의 여백

중앙선데이 2017.10.08 01:15 552호 29면 지면보기
삶과 믿음
어릴 적 아버지는 밭 가에 닥나무를 길렀다. 가을이 되면 닥나무 껍질을 벗겨 말려 두었다가 제지공장에 팔았다. 제지공장을 거쳐 온 닥나무 껍질은 하얀 창호지로 변해 있었다. 거친 닥나무 껍질이 제지공의 손을 거쳐 하얀 창호지로 바뀐 게 얼마나 신기하던지. 어린 마음에도 나는 문살에 발라 놓은 순백의 창호지를 보며 ‘나무의 영혼’ 같다고 생각했었다.
 
제지공 출신의 시인 유홍준은 노래했다. “펄프를 물에 풀어,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하느님 같다./ 흰 눈을 내려/ 세상을 문자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 조물주 같다.”
 
이 시인 같은 마음으로 순백의 종이를 보면, 조물주가 우리에게 선물하신 시간의 여백을 느낀다. 제지공들이 펄프를 물에 풀어 빚어 놓은 하얀 백지,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는 새로운 시간의 상징이다. 그 시간은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영혼의 빈칸과도 같다. 그 영혼의 빈칸에 우리는 먹물을 찍어 우리의 생을 써 넣어야 한다. 어떤 이는 그 빈칸에 창조적 생을 기록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이도 있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얽매인다든지 오지도 않은 미래를 염려하여 ‘지금 이 순간’을 풍요롭게 살지 못하는 이는 영혼의 빈칸을 숱한 얼룩으로 더럽히기나 할 것이다.
 
“나의 영혼은 그것이 창조되던 그 날만큼이나 젊습니다. 아니, 훨씬 더 젊습니다. 실로,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젊습니다. 내가 오늘보다 내일 더 젊어지지 못한다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것입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자기 영혼의 빈칸을 의식하고 사는 이는 창조적 젊음을 살 수 있다. 하얀 창호지처럼 여백으로 주어지는 시간을 새로운 삶을 살라는 창조주의 신호로 받아들일 테니까. 그것은 곧 ‘영원한 현재’에 둥지를 트는 일. 창조주에게는 매 순간이 태초(太初)다. 이런 자각이 있다면 우리는 자기 삶의 순간마다 태초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신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빚어 주셨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우리 내면에도 창조의 영(靈)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닐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창조의 영과 더불어 사는 일을 은유적 표현으로 ‘창조주 안에 둥지를 트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창조주 안에 둥지를 트는 삶을 통해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영원한 젊음을 누리시는 신의 창조의 파트너가 되는 일이다.
 
우리가 그처럼 신의 창조의 파트너로 살아가려면, 우리는 불순물을 걸러 내고 나무의 영혼으로 거듭난 순백의 종이처럼 우리 자신을 날마다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곧 자기를 비우는 일. 자기를 비울 때 비로소 창조의 영이 우리 속에서 일하실 수 있으니까. 아무튼 자기를 비우는 것은 우리 안에서 창조주가 일하실 거룩한 틈을 만드는 것이다.
 
닥나무가 변해 빚어진 순백의 종이는 자기 몸에 담길 먹 냄새 배인 문향(文香)을 그리워한다. 신의 은총으로 자기를 비워 해맑게 거듭난 영혼은 그 내면에 담길 그리스도의 향기를 그리워한다. 그 향기는 영원한 젊음을 누리시는 창조주와의 합일에서 피어나는 향기며, 이웃과의 화목에서 피어나는 향기다.
 
 
고진하 목사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김달진 문학상과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원주 한살림 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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