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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일인칭 서술 좇다 만나는 망각과 기만의 인간 모습

중앙선데이 2017.10.08 01:02 552호 11면 지면보기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세계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 [AP=연합뉴스]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 [AP=연합뉴스]

예측 밖 인물이었지만 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해양학자 아버지의 연구를 위해 런던으로 이주한 뒤 영어로 글을 쓰며 영국 국적의 소설가로 살고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63)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강한 감정적 힘 지닌 소설 통해
우리가 세상과 연결됐다는
환상 이면에 도사린 심연 보여줘

영국서 영어로 쓰는 일본 출신
국가·인종·문화적 정체성 섞여

 
이시구로의 소설을 읽는 경험은 한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그의, 혹은 그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 기억은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때로는 명징하고 때로는 의미심장한 듯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임의로 왜곡되고 변형되는, 잡아당기는 대로 모양이 달라지는 망사와도 같은 직물이다. 이시구로의 장편소설은 최근작 『파묻힌 거인』(The Buried Giant, 2015)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 한 명의 일인칭 화자 시점의 서사다. 화자들은 하나같이 영미문학에서 손꼽히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로, 담담하고 진중하게 들리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만하지 않은 기만적인 서술자다. 그것이 이시구로의 작품 속에서 그들이 맡는 역할이다. 우리 모두 우리 삶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조립하고 윤색하고 짜깁기해 기억하고 말하듯이.
 
『남아 있는 나날』로 부커상 받아
이시구로에게 부커상을 안겨 준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1989)의 화자 스티븐스는 다른 어떤 일에도, 사람에게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집사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노년기 남성이다. 한번 들면 내려놓기 힘든 대표작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 2005)의 화자 캐시 M은 장기기증용으로 복제된 인조인간 여성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11년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다른 복제인간의 장기기증 과정을 보살피는 간호 임무를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선택권과 주도권을 행사하며 수행했다고 믿고자 한다. 이들이 살아가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기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는 것은 우리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목소리는 낯설지 않고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대면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중대하고 파멸적인 역사의 흐름에서 자신이 크고 작게 연결됐을지 모르는 맥락을 외면하고, 혹은 자신은 그런 큰 맥락을 이해할 능력과 힘이 없다고 믿고, 자신이 충성해야 할 단 하나의 대상만을 정한 뒤 긍지를 느끼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우리는 긴 세월 봐 왔다. 현재도 매일같이 마주치는, 혹은 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자기부정, 자기기만 없이 살아가기엔 너무 고되고 복잡한 역사를 우린 오랫동안 겪어 오지 않았던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알리는 노벨상 웹사이트. [연합뉴스]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알리는 노벨상 웹사이트. [연합뉴스]

노벨상위원회는 올해 문학상 수상자 선정 이유로 이시구로가 “압도적인 감정적 힘을 지닌” 소설들을 통해 “우리가 세상과 연결돼 있다는 환상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심연을 열어 보여 주는”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그의 작품은 표면적인 사건은 거의 없이 모두 회고가 줄거리인 내면의 서사로, 주인공은 전통적인 서사에서 맡았던 행위의 주체로서 역할을 하지 않고 기억하고 말할 뿐이다. 정확하지 않게 기억하고, 모순되게 말하며, 그러한 사실을 대면하는 순간에도 애써 외면하거나 “그때 다르게 했던들 뭐가 달라졌겠나”라고 항변한다.
 
이에 대해 노벨상위원회는 이시구로가 “과거를, 그리고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려는 것이지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살아가기 위해 망각과 기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이 이시구로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작고 나약한 그들의, 즉 우리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들려주고 여기에 귀 기울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다일지 모른다.
 
내면 서사로 현대소설의 과제 확장  
내면의 서사, 목소리 중심의 스토리텔링 그 자체가 이시구로의 독자적인 업적은 아니지만 분명 이시구로는 내면 서사로서 현대소설의 과제를 한 폭 확장시키고 또 자신만의 분명한 색채를 더했다. 이러한 독보성은 그의 정체성과 예술성에 있어서의 혼종성에서 오는 것으로, 당대에 이시구로를 예술가로서 규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는 과거 세계를 지배했으나 현재는 유럽 안에서의, 더 나아가 세계 속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는 영국에서 일본 출신 동양인으로 살고 있다. 그런 이시구로는 현재 세계어로 통용되는 영어로 일본인 여성과 남성(『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영국인 집사를, 여성 복제인간을, 고대 민담 속 기억을 잃은 부부(『파묻힌 거인』)를 화자로 소설을 쓰는 작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더 이상 균질적이거나 경계가 명확한 곳이 아니듯이 우리의 국가적·인종적·문화적·성적 정체성 모두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종적으로 섞이는 가운데 과거, 즉 역사는 지워지거나 잊히거나 왜곡을 위해 소집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각자의 혼돈속에 살고 있는 이질적이고 개별적 인물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도록 목소리를 부여하는 일은 이시구로가 혼종의 정체성을 지닌 작가이기에 적격일 것이다. 이미 그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창래를 비롯해 혼종적 경계인의 정체성을 지닌 여러 작가에게 큰 영향을 줬으며, 무라카미 하루키를 포함한 일본의 많은 작가에게도 널리 읽히고 있다.
 
노벨 문학상 발표 후 영국 언론에 전한 소감에서 이시구로는 이번 수상으로 우리가 “국제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며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이 불확실하게 보이는 지금, 이번 수상이 조금이나마 좋은 방향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영국 작가로서 이민자들을 배척하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비판했고, 일본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일본계 작가로서 일본의 과거 군국주의 침략에 대한 의도적 망각을 지적해 온 소신이 읽히는 소감이다.
 
이 불확실성의 세계 속에서 이시구로는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접한 뒤 처음에는 가짜뉴스일 거라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인 것을 확인한 후에는 자신이 이런 상을 받기에 너무 젊은 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는데, 불현듯 자신의 나이가 예순둘인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시간은 이미 흘러갔고, 이시구로는 초로의 작가로 노벨상을 받아 이제 한국에서 더 많은, 더 다양한 독자들을 만나 새롭게 읽히는 관계가 시작될 것이다. 살아 있는 매 순간 시간과 기억 속에서 기만되고 변주되는 정체성, 이것이 이시구로가 만드는 이야기이며 그만의 목소리로 만드는 그의, 또한 우리의 이야기이므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창백한 언덕 풍경』(1982) 데뷔작, 위니프레드 홀트비상 수상
영국으로 이주한 일본 여성 에쓰코는 딸의 자살을 대면해야 하는 현재와 원자폭탄 투하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은 나가사키에서의 기억을 오간다. 고요하고 창백한 분위기로 전쟁을, 또한 전쟁 같은 현실을 그린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1986) 휘트브레드상 수상
일본의 노화가 오노 마수지는 세상이 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제국주의가 일본을 휩쓸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삶과 예술을 회고한다.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만은 정확하게 말하는 기만적인 화자의 언어가 작품을 끌고 나간다.
 
『남아 있는 나날』(1989) 부커상 수상
영국 전원 대저택의 집사 스티븐스는 과거 동료였고 자신에게 다가왔던 미스 켄튼을 찾아가는 여정 동안 양대 세계대전 사이 당시 주인 달링턴 경의 외교 행적을 되짚고 자신이 하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과거의 일들을 회고한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1995) 첼튼햄상 수상
유명 피아니스트 라이더가 사흘 연주회 일정 동안 벌어지는 상황을 혼돈스러운 내면과 기억의 목소리로 엮어 낸다. 꿈과 현실, 화자의 정체성, 과거와 현재가 계속 뒤엉키는, 이시구로 작품 중 가장 실험적이고 난해한 소설로 출간 당시 혹평 일색이었으나 최고작이라는 재평가가 뒤늦게 이어졌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2000)
어린 시절 상하이에서 부모를 잃은 사립탐정 뱅크스가 청일전쟁의 화염 속 상하이로 돌아가 부모를 찾는 여정을 그렸다.
 
『나를 보내지 마』(2005)
장기기증용 복제인간 캐시 M은 자신에게 여생이 8개월 남은 시점에서 과거 기숙학교의 동기, 가까웠던 친구 루스,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루스와 사랑하게 된 토미를 찾아 그들의 장기기증 수술을 간호한 시간들을 되짚는다.
 
『파묻힌 거인』(2015)
색슨족과 브리튼족이 용·거인·괴물들과 함께 살고 있는 고대 영국. 액슬 부부가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것이 확실하지는 않은) 아들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 끝에 기억을 되찾는 이야기. 이시구로 작품 중 처음으로 삼인칭 화자 및 여러 일인칭 화자를 도입해 서사기법의 큰 변화를 보이며 집단의 기억과 망각의 시선으로 옮겨 간다.
 
 
정하연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영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소설과 산문과 논문을 쓰고 번역한다. 하버드리뷰·뉴욕타임스 등에 글을 발표했으며 오정희·신경숙·김훈 등의 소설을 영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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