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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페이 “오랫동안 학수고대하던 노인이 온다”

중앙선데이 2017.10.08 01:00 552호 28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49>
광둥에 도착한 덩샤오핑. 1992년 1월 19일 선전 영빈관.

광둥에 도착한 덩샤오핑. 1992년 1월 19일 선전 영빈관.

1992년 1월,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광둥(廣東) 방문은 이유가 있었다. 얘기는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6년 초가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혁도 종지부를 찍었다. 10년간 들끓었던 광기가 끝나자 중국은 기로에 직면했다. 새로운 선택을 놓고 갈팡질팡했다.

천안문 사태 풍파 가라앉자
좌파 대놓고 개혁·개방 비판
덩, 좌풍 경계하려 남순 결심
“무모하지 않으면 되는 일 없어”

 
정계에 복귀한 덩샤오핑의 선택이 주목을 받았다. “개혁이 아니면 출로가 없다. 지난 수십 년간 해 온 우리의 실천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도자의 의무는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려면 그간 해 온 모든 것들을 뜯어고쳐야 한다.”  
 
한비자(韓非子)의 구절을 인용하며 개방 의지도 천명했다. “세상이 변하면 하는 일도 달라진다. 다른 일 하려면 준비해야 한다(世異則事異, 事異則備變). 쇄국(鎖國)은 개혁의 장애물이다. 고립이라는 낡은 길을 멀리하고, 세계를 향해 우리를 개방시켜야 한다. 한번 갔던 길 다시는 가지 말자. 낙후와 빈곤만이 있을 뿐이다.”
 
당 전체회의에서 구상을 털어놨다. “우리는 경제를 잘 모른다. 모르는 건 아는 사람에게 배우면 된다. 외국의 관리방법을 배워서 도입하자. 일부 지역에서 시험 삼아 해 본 후에 전국적인 방안을 수립할 생각이다.” 시험의 목적도 설명했다. “모순이 발생하면 빠른 시간 내에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회의 기간 덩샤오핑은 광둥성 대표 시중쉰(習仲勛·습중훈)을 불렀다. “광둥은 경제시험구 설치에 적합한 지역이다. 너는 청년 시절 홍색특구(紅色特區)를 만든 경험이 있다. 지금은 경제특구를 만들 시점이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라.”        
 
국가수출입위원회 주임 구무(谷牧·곡목)와 부주임 장쩌민(江澤民·강택민)이 해외시찰단을 조직했다. 51일간 각국의 자유무역지구와 보세구역을 순방하며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덩샤오핑은 동화책을 좋아했다. 지방 시찰할 때마다 손자에게 동화책을 빌려 갔다. [사진 김명호 제공]

덩샤오핑은 동화책을 좋아했다. 지방 시찰할 때마다 손자에게 동화책을 빌려 갔다. [사진 김명호 제공]

1980년 5월 중순, 중공 중앙과 국무원은 광둥성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와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에 경제특구를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특구의 주권은 중국에 있다. 경제개방정책에 의해 화교와 외국 기업, 중외합작 공장 설립을 허락한다.”  
 
덩샤오핑은 속도를 중요시했다. “무슨 일이건 빨리 해치워야 한다. 느려 터지다 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1984년 1월에는 직접 특구를 방문해 관계자들을 독려했다. “시간이 돈이라면, 효율은 생명이다. 건물을 하루에 한 층씩 올려라. 신기술 받아들이고, 지식을 넓혀라. 관리도 지식이다. 열심히 배워라.”  
 
개혁과 개방, 말은 좋지만 행로는 험난했다. 전직 고위 관리의 회고를 소개한다. “개혁 개방 초기, 중국인들은 돈을 무서워했다. 자본 공포증 환자들이 많았다. 일본이 차관 1700억 엔을 제공한 적이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36억 엔 밖에는 쓰지 못했다. 비슷한 일이 많았다. 덩샤오핑은 500만 달러 이하는 임의로 지출하라고 했다. 투자 개념이 없다 보니,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중국은 동요했다. 풍파가 가라앉자 좌파 정치가와 이론가들이 덩샤오핑을 대놓고 비판했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초래했다. 경제특구가 그 온상이다. 개혁 개방은 위험한 정책이다. 외국자본 유입으로 중국은 국제 자산계급의 부속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했다.”
 
정치판이 복잡해졌다. 10년간 진행된 개혁 개방정책도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덩샤오핑은 1년간 말 한마디 없이 집안에만 틀어박혔다. 재미있는 소문이 나돌았다. “베이징에 바람의 방향만 관찰하는 냉정한 노인이 있다.”
 
사태를 관망하던 덩샤오핑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좌풍(左風)을 경계하고, 개혁의 목표를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남순(南巡)을 결심했다. “당의 전통을 비판한다는 소리 들을 수 있다”는 측근들의 만류도 뿌리쳤다. “평생 무모한 일만 골라서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무모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고, 되는 일도 없다. 가서 내 눈으로 직접 보겠다.”  
 
1992년 1월 11일 새벽, 출장 중이던 중공 광둥성 위원회 부비서장 천카이즈(陳開枝·진개지)의 침실에 전화 벨이 울렸다. 성 서기 셰페이(謝非·사비)의 전화였다. “우리가 오랫동안 학수고대하던 노인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장 돌아와서 접대와 경호대책 세우기 바란다. 시간이 1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노인이 누구인지는 동화책 챙기라는 말로 대신했다.
 
성 위원회로 돌아온 천카이즈는 중앙 판공청에서 발송한 비밀전문을 접했다.  “샤오핑 동지가 남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한다. 접대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휴식 장소와 음식장만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천카이즈가 엉뚱한 발언을 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때다. 전략적 행동임이 분명하다. 노인은 일과 휴식을 구분 못하는 성격이다. 해마다 정초 휴식을 위해 상하이로 갔지만 진정한 휴식을 취한 적이 없다. 역사적 사건을 겪을 마음의 준비만 하면 된다.”
 
3일 후, 선발대가 광저우에 도착했다. 천카이즈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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