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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 좋아하네’라고 비웃는 게 창의성에 이르는 길

중앙선데이 2017.10.08 00:45 552호 8면 지면보기
[김환영의 지식 톡톡톡] ‘고전 전도사’ 진형준 한국상상학회 회장
진형준 한국상상학회 회장은 고전 축역본을 46권 탈고했다. 최근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끝내고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을 쓰고 있다. 조문규 기자

진형준 한국상상학회 회장은 고전 축역본을 46권 탈고했다. 최근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끝내고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을 쓰고 있다. 조문규 기자

정독(精讀)이냐 다독(多讀)이냐. 고전(古典)이냐 신서(新書)냐. 어쩌면 고민할 필요 없는 전형적인 ‘가짜 2분법(false dichotomy)’이다. 독자마다 정독과 다독 사이, 고전과 신서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으면 된다. 고전을 신서처럼 읽으며 정독·다독을 넘나들 수 있는 독자는 공력(工力)이 엄청난 독자다. 고전을 읽으면 ‘폼’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와 있듯이’ ‘단테의 『신곡』에 나타난 인간 유형에 비추어 본다면’이라고 하면 대화 상대편은 기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전 읽기는 고통스럽다. 오죽하면 대문호 마크 트웨인(1835~1910)이 “누구나 자신이 이미 읽었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읽기를 바라지 않는 게 고전이다(A classic is something that everybody wants to have read and nobody wants to read)”고 말했을까.

자기 시대의 가치관·유행 벗어나
주체 되려는 몸짓서 창의력 발현
남이 비웃어도 버티는 똥배짱 중요

『일리아스』 등 고전 축역본 만들며
원고료 때문에 늘린 것, 훈계는 빼
게임에 빠진 아이처럼 신나게 일해


 
세계문학컬렉션

세계문학컬렉션

진형준 한국상상학회 회장이 고전 읽기 대중화를 위해 ‘고통 경감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최근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파우스트』가 포함된 세계문학컬렉션 20권을 냈다. 고전의 ‘축역본(remaster edition)’이다. 200쪽이 안 되는 분량으로 각 고전의 핵심을 추렸다. 하지만 고전을 줄이는 과정에서 ‘왜곡’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안 읽고도 읽은 척’할 수 있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이 궁금해 진형준 회장을 중앙SUNDAY 대회의실에서 지난달 13일 인터뷰했다. 진 회장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를 했다. 문학평론가·불문학자로 활동한 그는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으로도 일했다.
 
고전은 읽기가 고통스럽다. 고전을 줄이는 작업 또한 고통스럽지 않았는가.
“아니다. 재미에 빠져 신나게 일했다. 오전 2~3시부터 매달렸다. 나이도 있고 해서 몸을 생각해야 하니까 ‘점심 먹은 후에는 절대로 작업하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지만 오후에 나도 모르게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집사람이 ‘꼭 컴퓨터 게임에 빠진 아이 같다’고 놀렸다. 독자들이 그 재미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46권을 써 놨고, 이번에 20권이 먼저 나온 것이다. 앞으로 100권까지 5년 정도 더 작업을 할 것 같은데 그때까지 계속 재미있게 일하겠다.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 자녀를 둔 30~40대 어머니들이 이 책들을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재미있게 책을 읽어야 아이들도 저절로 책으로 손길이 간다. 그냥 아이들 옆에 책을 던져 놓으시라. 절대로 ‘읽으라’고 강요는 마시라. 억지로 읽게 되면 그 한 권으로 끝나지만 재미를 느끼면 읽지 말라고 해도 읽는다. 할아버지·할머니들께도 권하고 싶다. 3대가 함께 읽기 좋은 책이라고 자부한다.”
 
이 작업에 착수한 계기는.
“살림출판사 심만수 대표 때문이다. 그는 10여 년 전부터 늘 ‘이대로 교육을 놔 두면 안 된다. 외우고 시험 보고 시험 점수를 받아서 점수 맞춰 대학 가는 게 우리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한 바가 분명히 있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사유할 수 있는 인재가 다수를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온다’ ‘사유할 수 있게 아이들을 키우려면 책을 읽혀야 한다’가 그의 소신이다. 심 대표는 문학·세계사·인문사상·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아이들이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전체 250권 시리즈를 기획했는데 ‘문학은 진형준 당신이 혼자 맡아 하라’고 말했다.”
 
실제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은.
“35년간 교수·문학평론가 생활을 하면서 잃어버렸던 무상(無想)의 책 읽는 기쁨을 다시 한번 맛볼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맡게 됐다. 옛날에 다 읽었던 고전이니까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근데 다시 고전을 읽어 보니 못 읽겠더라. 생각만큼 재미가 없었다. 옛날에 이 두꺼운 것, 이 재미없는 것을 어떻게 나름 재미있게 읽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세상이 변하면서 나도 변한 것이다. ‘왜 고전을 읽지 않느냐’고 닦달해 왔지만 강요가 실은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의욕이 생겼다.”
 
독서에 즉시발복(卽時發福) 효과는 없다. 책을 안 읽어도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 책을 읽으라고 어떻게 예비 독자들을 설득할 것인가.
“설득은 정말 어렵다.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안 된다. 제일 효과가 없는 게 논리다. 설득의 기본은 간단하다. 일단 지금처럼 책을 안 읽는 상태로 놔 두면 안 된다. 책을 읽어서 생기는 이익은 나중 이야기다. 우선 책에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게 다 같이 노력하자. 환경을 만들어 준 뒤 책을 저절로 좋아하건 말건은 다음 일이다. 지금까지는 ‘책이 중요하니 읽어라’고 떠들기만 했지 환경은 만들어 주지 않았다. 삼키기 어려운 쓴 약을 입에 갖다 대면서 삼키지 않는다고 욕하는 것은 문제다. 우선 삼키기 좋은 당의정(糖衣錠) 같은 책을 만들자. 사람들은 당의정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당의정이라고 해서 약효를 잃는 것은 아니다.”
 
상상학회 회장이기도 한데 상상학이라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인가.
“상상학은 기존의 인간학을 뒤집고 새롭게 세상을 보는 눈을 제시하는 학문이다. 제가 공부한 질베르 뒤랑(1921~2012)이 창시한 학문이다.”
 
상상력은 창의성과 밀접하다. 창의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창의성은 자신이 속한 장소, 가치관, 시대적 유행에서 벗어나 자신이 주체가 되려는 몸짓에서 발현된다. 창의성에 대해 너무 떠들고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창의성을 억누르고 창의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똥배짱으로 버티는 것, 그게 창의적인 인간이 되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남들이 아무도 안 하는 것을, 남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해도 그냥 밀고 나가면서 해 보는 것, 남들이 다들 우르르 한곳으로 몰려가도 ‘나 몰라라’하고 버티는 것이 창의로 가는 길이다. 다들 ‘창의성! 창의성!’을 외칠 때 ‘창의성 좋아하네’라고 비웃는 것이 창의성에 이르는 길이다.”
 
독서와 창의성은 어떤 관계인가.
“물론 책을 읽어야만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복하자면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창의성으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 그 책을 보고 뭔가 배운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감동과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책을 읽은 사람이 많은 사회는 알록달록한 사회가 될 수 있다.”
 
당신을 창의적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제가 뭐 창의적이라고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이런 과감한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비교적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아버지나 형님께서 외판원들에게 ‘속아서’ 산 것이겠지만 집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아무도 억지로 보라고 하지 않았지만 끄집어내 읽게 됐다. 제가 조금이라도 창의적인 면이 있다면 그때 그 환경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종의 삼위일체를 이루는 상상력·창의력·호기심은 타고나는 것인가, 환경인가.
“환경이다. 타고나는 것에 맡기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예전에 우리는 사람을 지능이라는 척도로 평가했다. 머리만 좋으면 훌륭하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인간 내부로부터 튀어나오는 재능은 다양하다. 재능이 튀어나올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누군가 공자님께 누가 제일 뛰어난지 물었다. 공자님은 ‘아무개가 가장 뛰어나다’고 대답하지 않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누구는 외교부 장관에 적합하고, 누구는 내무부 장관에 적합하고, 누구는 이러저러하니까 국방부 장관에 적합하다’고 대답했다. 재능이 다 다르다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다. 여러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게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좋은 방법이다. 우리가 자꾸 타고난 재주, 지능만을 척도로 삼으니까 사람들을 기계처럼 취급하게 되고 일렬로 줄을 세우게 된다.

머리가 좋다고 저절로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을 기계로 쳐서는 안 되겠지만 머리가 좋다는 것은 기계 속 여러 부품 중 한쪽 부품이 뛰어난 것뿐이다. 다른 부품들도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상상력을 전공한 입장에서 ‘상상력은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는 주장은 탐탁지 않다. 인간은 어차피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변화를 겪는다. 우리 아이들에게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타고난 자질로 살아가야만 하는 게 인생이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쓸쓸할까.”
 
이번 시리즈는 면접이나 논술 등에서 악용될 가능성이 있는 고전의 요약인가.
“절대 요약이 아니다. 원작을 신성시해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 짜깁기하지도 않았다. 원전은 중요하지만 신성불가침은 아니다.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중요한 고전이라도 필요 없는 부분도 많다. 원고료 때문에 길게 늘린 작품도 간혹 있다. 또 자신의 사상이나 정신을 독자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는 사명감에 차 있는 작가들 중에는 사설과 훈계가 많다. 우선 그런 것들을 뺐다. 그런 다음에는 ‘만약 작가가 이 시대에 맞게 작품을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했다.”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독자들의 초기 반응은.
“쑥스럽기는 하지만 전문가들이 저보고 ‘이것을 내줘 고맙다’며 ‘당신이 쓴 것을 보니까 이해가 안 되던 작품의 정신이 포착된다’고 할 때 제일 반가웠다.”
 
당신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 작품은 ’개인에게 배달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늘 한다.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진지한 마음과 만나는 것이다. 속을 터놓는 사람이 별로 없는 세상에서 벌거벗은 사람의 마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정말 소중한 것 아닌가.”
 
 
김환영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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