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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고통스러운 얘기, 에둘러 얘기하는 게 소설"

중앙일보 2017.10.05 23:15
 [AP Photo/Alastair Grant]

[AP Photo/Alastair Grant]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도 의외의 선택을 했다.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63)는 국내 독자에게 전혀 생소한 작가는 아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번역돼 있는데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아 있는 나날'과 '네버 렛미 고'가 국내 상영돼 주목을 받아서다. 하지만 독자들의 상대적인 무관심 속에 작가로서 존재감은 희미한 편이었다. 해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영국의 도박 사이트 래드브록스의 수상자 베팅에서 그는 아예 순위에도 들지 못했다. 소설 『남아 있는 나날』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하는 등 좋은 작가라는 데는 이론이 없지만 아무도 그를 노벨상과 연관 짓지 않았다. 그의 작품을 번역한 국내 번역자들조차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학
번역가 김석희씨 "문학의 표현양식 극한까지 밀어붙인 작가"

 하지만 영미권에서 작가로서 그의 입지는 확고하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 첫 장편 『창백한 언덕 풍경』부터 관심을 끌기 시작해 두 번째 장편 『떠도는 세상의 예술가』로 휘트브레드상 등을 받았다. 세 번째 장편 『남아 있는 나날』은 뉴욕타임스로부터 "마술에 가까운 솜씨"라는 찬사를 받으며 영어판이 100만 부 이상 팔렸고,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출간됐다. 역시 대표작이라고 해야 할 장편 『나를 보내지 마』는 타임지 선정 100대 영문소설에 포함됐고, 37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그런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에 대영제국훈장을, 98년에는 프랑스 문예훈장을 받았다. 한국에서만 유독 그에게 인색했던 셈이다.
 
 2015년에 발표한 『파묻힌 거인』까지 그는 모두 8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국내에도 출간된 소설집 『녹턴』 등 단편소설은 물론 시나리오와 TV 드라마, 노래 작사에도 손댔다. 다양한 관심만큼이나 그의 소설 스펙트럼은 다채롭다. 1·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남아 있는 나날』)부터 SF(『나를 보내지 마』), 추리소설(『우리가 고아였을 때』)까지 여러 장르를 섭렵했다. 하지만 장르적 특성은 약한 편이라는 평가다. 다양한 장르 틀 안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관심을 녹인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역시 일본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영국에 건너가 형성된 정체성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일본 여성인 그의 어머니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현장에 있었다. 10대 후반의 나이였고, 폭탄 파편에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이런 가계사가 녹아 있는 작품이 첫 장편 『창백한 언덕 풍경』이다.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사는 소설의 여주인공 에츠코는 장성한 딸이 자살을 한다. 하지만 소설은 에츠코의 얘기를 직접적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전쟁 전 나가사키에서 나누었던 친구와의 우정 얘기를 통해 에둘러 에츠코의 고통을 전한다. 이런 글쓰기 방식에 대해 이시구로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너무 고통스럽거나 어색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상황을 빌려 자기 얘기를 하게 만드는 것이 소설을 이야기하는 흥미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원폭 이후 일본을 그리되 원폭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일본의 '원폭 문학'과 달리 담담한 서술로 인간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는 얘기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역시 작가 이시구로의 개성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제임스 조이스 식의 의식의 흐름처럼 보이는 내용이 500쪽 이상 이어져 작품에 대한 열띤 찬반 양론을 불렀다. "불량한 소설"이라는 비판 반대편에 "거의 확실한 걸작"이라는 상찬도 있었다고 한다. 이 소설을 번역한 번역가 김석희씨는 "굉장히 개성적인 소설이다. 소설의 표현 양식을 거의 극한까지 밀어 붙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며 "작년에 밥 딜런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해 문학판을 흔들었던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에는 가장 문학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내용이 난해해 쉽게 읽히지 않지만 이시구로는 가장 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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