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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공통의 보편성에 기초해 독자 무장해제시키는 작가

중앙일보 2017.10.05 21:45
인류라는 종이 만들어낸 '신비롭고 기이한 제도, 곧 문학'(자크 데리다)은 아침보다는 저녁에, 성공보다는 실패에, 보이는 것보다는 감추어진 것에 주목한다. 서양문학을 번역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우리와는 문화와 역사가 다른 지식과 비판을 갖춘 독법이 필요한 남의 나라 이야기라는 것을 잊는 순간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은 이런 면에서 인간 공통의 보편성에 기초해 읽는 이를 무장해제시킨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일본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릴 때 가족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해 철학과 문예 창작을 공부한 일본계 영국작가인 이시구로는 처녀작 『창백한 언덕 풍경』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등의 작품에서 일본적 요소를 다루고 있지만 본인은 한 인터뷰에서 다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천착하는 '인터내셔널'한 작자이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좋은 소설이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세계 전역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비전이 담긴, 그렇지만 상당히 단순한 소설이라고 나는 믿는다. 대륙을 넘나들면서도 세계의 어느 후미진 구석에서도 단단히 뿌리 내릴 수 있는 인물들을 품고 있는 그런 소설 말이다."

번역자 김남주씨가 본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 세계

 그의 작품은 수식을 절제한 담백한 서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랬다'와 '그랬을 수도 있다'를 구분하고, "쓰인 것보다 쓰이지 않은 것을 주목하게 하"는 섬세함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은 영국에 사는 한 일본인 미망인의 목소리로 나가사키의 정신적 파괴와 재건을 그려낸 첫 장편 『창백한 언덕 풍경』, 한 화가의 시선으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본의 태도와 역사에 휘말린 인간, 정치와 예술 앞의 인간을 탐사하는 『부유하는 세상의 예술가』, 현실과 내면 의식을 오가는 실험적인 문제작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부모의 실종사건을 파헤치며 인간의 고독에 대해 말하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프게 묻는 대표작 『나를 보내지 마』, 그리고 음악과 황혼에 대한 아름다운 단편집 『녹턴』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한다.  
 2009년 『나를 보내지 마』를 시작으로 여러 해 동안 가즈오 이시구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먹먹하고 행복했다. 이시구로식 표현을 빌자면 그냥 좋은 작가가 아니라 '위대한' 작가일 수 있는 그와 우리 독자들이 좀더 가깝게 만나지 못해서 아쉽고 안타까웠다. 관계사로 이어지는 미묘한 향기가 나는 듯한 그의 문장들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사실 그의 작품처럼 문장보다는 행간으로, 언표보다는 침묵으로 말하기는 학습으로 얻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의 작품에 내재된 것은 문학적 계산이나 포석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히 분비되는 재능인 것 같다. 이런 미묘한 표현 방식을 지닌 작가가 있다는 것은, 해야 할 말보다 훨씬 많은 말들이 넘치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행운이다. 대낮보다는 황혼에, 성공보다는 아쉬운 실패에, 말끔하고 휘황한 태피스트리의 앞면보다 실밥과 매듭이 주렁거리는 이면에 주목하는, 우리에게 아직 삶을 제대로 세울 시간이 남아 있음을 환기시켜주는, 문학의 본령에 다가선 작가의 수상을 축하한다. 
 김남주·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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