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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펜화 공방

옥산장 201호

옥산장 201호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편의 부제목이다. 평창·정선 쪽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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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량에는 몇 채의 여관이 있다. 그중에서 나는 두 번 모두 옥산장여관에 묵어갔다. 옥산장 주인아주머니는 여느 여관집 주인과 다르다............ 여관 손님도 내 집 손님이요, 내 고향 방문객이라며 지난 늦가을 답사 때는 시루떡 한 말에 식혜를 한 동이 해서 밤참으로 내놓았다.
............  
사람 대하는 정이 이토록 극진하여 우리들 회식자리에 모셔놓고 노래부터 청하니 홍세민의 ‘흙에 살리라’를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로 하여 ‘아름다운 여량땅에 옥산장 지어놓고...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나는 야 흙에 살리라 여량땅에 살리라’를 창가조로 애잔하며 싹싹하게 부른다.  
아주머니 살아오신 얘기나 듣자 하니 이분의 사설은 가히 입신의 경지 이르러 나도 입심 좋다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그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었다. 시집와서 앞 못 보는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교편 잡은 남편 봉급으로는 애들 교육시키기 어려워 별의별 품을 다 팔고 나중엔 여관을 지으며 두 애를 대학까지 보내고 큰애는 장가보내 서울에 집도 마련해주는 삶의 고단함과 억척스러움을 유성기소리처럼 풀어가는 데 그 토막토막에는 사랑, 아픔, 페이소스, 낭만, 파국, 고뇌 결단, 실패, 좌절, 용기, 인내… 그리고 지금의 행복으로, 대하 구비문학을 장장 세 시간 풀어간다. 그렇게 하고 이것이 축약본이라는 것이다.
............  
답사 떠나며 엄마하고 싸우고 왔다는 한 노처녀 회원은 그날 밤 오밤중에 당장 전화를 걸어 잘못했다고 빌었다니 그 감동이 어떠했기에 그랬을까.
옥산장 아주머니의 드라마 중에는 틈새마다 아우라지강가의 수석 줄기가 끼여 있다. 속상하면 강가에 나아가 돌을 만지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조합융자가 안 나와 강가에 갔다가 주운 것이 학이 알을 낳는 형상, 빚을 못 갚아 막막하여 강가에 서성이다 주운 것이 명상하는 스님, 손님이 하나도 없어 속상해서 강에 나아가서는 호랑이와 삼신산............ 이런 식으로 중간중간에 매듭을 지어간다. 그리고나서는 이야기가 끝난 다음 여관 입구 진열장에 가득한 수석을 관람시키니............  
앞 못 보는 시어머니가 바람을 맞아 3년6개월을 한방에 살면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병구완했던 그 인내와 사랑을 만년에 모두 복으로 받는 인간 만세의 주인공, 옥산장 아주머니의 성함은 전옥매 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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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장은 이제 정선의 명소이고, 전옥매 할머니는 명사가 됐다. 할머니의 삶을 풀어놓은 책 『아우라지 별곡』 출판기념회 때는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내려왔다. 막막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끝내 일어선 할머니, 마땅히 박수 받을만하다.  
정선에서 강릉까지 구절양장 길을 따라가는 취재 중에 옥산장에서 하루를 묵었다. 지난달 중순이었는데 해가 떨어지니 반팔 입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여관은 규모가 커져 앞쪽 2층 건물이 손님숙소이고, 뒤쪽 한옥을 식당으로 쓴다.  
입구에 나란히 걸린 열쇠 중에 자기 방 것을 가져가면 된다. 할머니 손때가 묻은 수석들을 구경하며 계단을 올라가 201호 문을 여니 미리 히터를 틀어놓아 공기가 훈훈했다. 방은 소박하다. 꽃무늬 벽지에 비닐장판이 깔려있고, 침대보와 이불도 옛 분위기가 폴폴 풍긴다. 욕실에는 빨간 휴지통과 ‘고무다라이’가 놓여있다. 짐을 풀고 나와 인적 없는 여량 밤거리와 논길을 걷는데 하늘 가득 별이 흘렀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깨지 않고 오랜만에 내처 잤다.    

단체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니 식당 규모가 크다. 일하는 분들이 10명은 돼 보였다. 기력이 전만 못한 할머니는 이제 며느리와 딸에게 큰일을 맡겼다. 갖가지 산나물이며 두부며 묵이며 내는 음식들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슴슴하다. 우리 일행의 밥상을 살피던 할머니가 밥 한 그릇을 가져와서 더 먹으라고 권한다.  

식당 벽에는 옥산장을 찾았던 유명인들의 사진과 명함이 빼곡하다.  
1999년에 할머니와 유홍준 교수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두 분 다 흰머리가 없다.    

(아침에 일찍 눈을 떠 내가 묵은 201호를 그렸다)
 
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gang.co.kr
 
안충기 기자 사진
안충기 기자-화가

유홍준 답사기 속 옥산장 201호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편의 부제목이다. 평창·정선 쪽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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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량에는 몇 채의 여관이 있다. 그중에서 나는 두 번 모두 옥산장여관에 묵어갔다. 옥산장 주인아주머니는 여느 여관집 주인과 다르다............ 여관 손님도 내 집 손님이요, 내 고향 방문객이라며 지난 늦가을 답사 때는 시루떡 한 말에 식혜를 한 동이 해서 밤참으로 내놓았다.
............ 사람 대하는 정이 이토록 극진하여 우리들 회식자리에 모셔놓고 노래부터 청하니 홍세민의 ‘흙에 살리라’를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로 하여 ‘아름다운 여량땅에 옥산장 지어놓고...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나는 야 흙에 살리라 여량땅에 살리라’를 창가조로 애잔하며 싹싹하게 부른다. 아주머니 살아오신 얘기나 듣자 하니 이분의 사설은 가히 입신의 경지 이르러 나도 입심 좋다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그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었다. 시집와서 앞 못 보는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교편 잡은 남편 봉급으로는 애들 교육시키기 어려워 별의별 품을 다 팔고 나중엔 여관을 지으며 두 애를 대학까지 보내고 큰애는 장가보내 서울에 집도 마련해주는 삶의 고단함과 억척스러움을 유성기소리처럼 풀어가는 데 그 토막토막에는 사랑, 아픔, 페이소스, 낭만, 파국, 고뇌 결단, 실패, 좌절, 용기, 인내… 그리고 지금의 행복으로, 대하 구비문학을 장장 세 시간 풀어간다. 그렇게 하고 이것이 축약본이라는 것이다.
............ 답사 떠나며 엄마하고 싸우고 왔다는 한 노처녀 회원은 그날 밤 오밤중에 당장 전화를 걸어 잘못했다고 빌었다니 그 감동이 어떠했기에 그랬을까.
옥산장 아주머니의 드라마 중에는 틈새마다 아우라지강가의 수석 줄기가 끼여 있다. 속상하면 강가에 나아가 돌을 만지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조합융자가 안 나와 강가에 갔다가 주운 것이 학이 알을 낳는 형상, 빚을 못 갚아 막막하여 강가에 서성이다 주운 것이 명상하는 스님, 손님이 하나도 없어 속상해서 강에 나아가서는 호랑이와 삼신산............ 이런 식으로 중간중간에 매듭을 지어간다. 그리고나서는 이야기가 끝난 다음 여관 입구 진열장에 가득한 수석을 관람시키니............ 앞 못 보는 시어머니가 바람을 맞아 3년6개월을 한방에 살면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병구완했던 그 인내와 사랑을 만년에 모두 복으로 받는 인간 만세의 주인공, 옥산장 아주머니의 성함은 전옥매 여사다. ..................................................

옥산장은 이제 정선의 명소이고, 전옥매 할머니는 명사가 됐다. 할머니의 삶을 풀어놓은 책 『아우라지 별곡』 출판기념회 때는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내려왔다. 막막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끝내 일어선 할머니, 마땅히 박수 받을만하다. 정선에서 강릉까지 구절양장 길을 따라가는 취재 중에 옥산장에서 하루를 묵었다. 지난달 중순이었는데 해가 떨어지니 반팔 입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여관은 규모가 커져 앞쪽 2층 건물이 손님숙소이고, 뒤쪽 한옥을 식당으로 쓴다. 입구에 나란히 걸린 열쇠 중에 자기 방 것을 가져가면 된다. 할머니 손때가 묻은 수석들을 구경하며 계단을 올라가 201호 문을 여니 미리 히터를 틀어놓아 공기가 훈훈했다. 방은 소박하다. 꽃무늬 벽지에 비닐장판이 깔려있고, 침대보와 이불도 옛 분위기가 폴폴 풍긴다. 욕실에는 빨간 휴지통과 ‘고무다라이’가 놓여있다. 짐을 풀고 나와 인적 없는 여량 밤거리와 논길을 걷는데 하늘 가득 별이 흘렀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깨지 않고 오랜만에 내처 잤다.  
단체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니 식당 규모가 크다. 일하는 분들이 10명은 돼 보였다. 기력이 전만 못한 할머니는 이제 며느리와 딸에게 큰일을 맡겼다. 갖가지 산나물이며 두부며 묵이며 내는 음식들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슴슴하다. 우리 일행의 밥상을 살피던 할머니가 밥 한 그릇을 가져와서 더 먹으라고 권한다.
식당 벽에는 옥산장을 찾았던 유명인들의 사진과 명함이 빼곡하다. 1999년에 할머니와 유홍준 교수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두 분 다 흰머리가 없다.  
(아침에 일찍 눈을 떠 내가 묵은 201호를 그렸다)
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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