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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도 보면 덜 미안하려나"…추석이 괴로운 아버지들

중앙일보 2017.10.04 06:00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해야 하나…."
 
대기업 사원 김모(32)씨는 추석 연휴 내내 마음이 편치 않다. 계획 없이 소파에 앉아 리모컨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가족들의 원망스런 시선이 느껴졌다. 
 
연휴를 앞두고 일본행 항공권을 검색하다 포기한 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김씨는 "추석 전 항공권을 알아보니 대부분 매진됐거나 대기상태라 구매하질 못했는데 이렇게 가족 눈치 볼 줄 알았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볼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직장인 김모(35)씨는 연휴 이후를 걱정하고 있다. 황금연휴를 맞아 부인과 함께 태교 여행으로 필리핀 세부에 갔다. 추석 직전까지 일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연휴만 손꼽아 기다리는 부인의 눈치가 보여 급히 여행 계획을 짰다. 결국 항공권에만 150만원 넘게 돈을 썼다. 김씨는 "동남아를 유럽보다 더 비싸게 주고 다녀온 기분이다. 여행 비용으로 쓴 카드값 걱정이 벌써부터 된다"고 말했다.
 
역대 최장인 올해 추석연휴를 앞두고 28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여행객들이 출국게이트 앞에 길게 줄서고 있다. [연합뉴스]

역대 최장인 올해 추석연휴를 앞두고 28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여행객들이 출국게이트 앞에 길게 줄서고 있다. [연합뉴스]

 
역대 가장 긴 열흘간의 추석 연휴를 보내는 일부 가장들의 한숨이 깊다. 화려한 휴가를 보낸 이들은 과소비 후유증으로, 무계획 연휴를 보내는 가장들은 가족들 눈치가 보여서다. 
 
긴 연휴를 다 쉬지 못하고 일터에 나가는 가장들은 더 안타깝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손모(55)씨는 "이번 추석 연휴가 누구를 위한 황금연휴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연휴 기간이 길어 고향에는 잠깐 다녀왔지만, 내일부터는 회사로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인들이 여행 자랑을 할 때면 자리를 피하고 싶다고 했다. 손씨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황금연휴는 남의 얘기다. 연휴가 길수록 나만 쉬지 못하는 것 같아 가족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며 한숨을 쉬었다.
 
여행업계는 이번 연휴 기간 동안 해외로 떠나는 관광객이 130만명은 넘어설 것으로 예측했다. 쇼핑사이트 11번가가 10월 황금연휴(9월 30일부터 10월 8일까지) 항공권 판매 현황을 7월 여름휴가(7월 22부터 30일까지) 기간과 비교한 결과 매출이 106%, 결제 건수가 37%, 이용자가 29%씩 늘었다. 비행기표 구하기가 힘들다보니 '1인당 평균 구입 단가'에서도 차이가 났다. 7월 39만2000원에서 10월 62만7000원으로 60%나 뛰었다.
 
대학교수 송모(61)씨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부부모임을 가졌다. "긴 연휴를 그냥 낭비하지 말고 함께 뭐라도 의미있는 것을 해보자"는 부인의 권유에 아이디어를 짜냈다. 송씨는 "차례를 지내도 남은 시간이 워낙 길어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연휴가 긴 건 좋지만 그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나름의 스트레스가 있다"고 말했다. 
 
추석 연휴 때면 전국 주요 고속도로가 귀경길에 나선 차량들로 정체현상을 빚는다. [중앙포토]

추석 연휴 때면 전국 주요 고속도로가 귀경길에 나선 차량들로 정체현상을 빚는다. [중앙포토]

 
'명절 스트레스'는 며느리의 것만이 아니다. 경남 사천이 고향인 공무원 이모(34)씨는 "처가집에서 차례를 지낸 뒤 전남 여수로 놀러 가자고 한다. 장인·장모님을 모시고 장시간 운전을 할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고 말했다.
 
황금연휴에 말못할 고민만 늘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아파트 경비원 최모(65)씨는 "형제들이나 자식들 모두 국내외로 여행을 가거나 자기 일로 바빠서 얼굴을 보지 못했다"며 "명절이라는게 하루라도 얼굴 보고 정을 나누자는 건데 그런 의미가 계속 퇴색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규진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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