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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의 寫眞萬事]영화속의 병자호란, 역사속의 병자호란

중앙일보 2017.10.04 00:42
 380여 년이 지난 과거 어느 시점의 역사적 사건을 오늘의 관점으로 재단하는 행위는 무모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리석은 역사를 방치한 나머지 피할 수 있는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다시 노출돼 국민 대다수의 안위가 위험하게 되거나 나아가 국가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지나간 역사를 오늘에 맞게 해석하고 평가하는 행위는 불가피하다.  
 
  현재 서울 잠실 롯데월드 옆 석촌호수가에 세워진 ‘대청황제공덕비’, 일명 ‘삼전도비’에는 조선의 신하들이 국왕 인조의 어리석음을 사죄하고, 후금의 황제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고 그대로 둔 것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인조를 비롯한 지도층이 항복할 때까지 40여 일 동안 남한산성을 포위한 후금의 병사들은 지금의 잠실과 성남시 일대를 초토화시키면서 결국 50여 만 명의 민간인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동지 섣달의 추위속에서 당시 이들이 저지른 만행의 구체적 내용은 유감스럽게도 알려진 바가 없다.
 
전쟁기념관에서 진행중인 병자호란 전시회의 홍타이지 초상화. 이 전시회는 11월19일까지 계속된다.

전쟁기념관에서 진행중인 병자호란 전시회의 홍타이지 초상화. 이 전시회는 11월19일까지 계속된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정세에 어두운 지도층의 무능은 그들 자신의 파멸은 물론이고 아무 죄없는 민중의 삶마저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다. 조선의 무능한 조정은 100년여의 내전을 통해 군사강국으로 부상한 왜국을 과소평가하여 온 국토가 유린되는 피해를 자초한 뒤에도(임진왜란) 이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몽골 지역과 만주, 중국 동북지방을 석권한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의 저력과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망하기 일보직전이었던 명과의 관계에만 병적으로 집착한 혼군 인조와 지도층의 분열이 부른 참화였다.  
 
 선비 이호가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 인조에게 올린 상소문. '전하가 직언을 싫어하여 입을 닫고 말조심하는 분위기가 퍼져있다', '당파끼리 불화하고 신료들의 논의가 대립되는 와중에 참소하는 자들만 득세하고 있다'는 내용 등이다.

선비 이호가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 인조에게 올린 상소문. '전하가 직언을 싫어하여 입을 닫고 말조심하는 분위기가 퍼져있다', '당파끼리 불화하고 신료들의 논의가 대립되는 와중에 참소하는 자들만 득세하고 있다'는 내용 등이다.

  인조가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맛보았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는 살아남았고 조선이라는 국체도 유지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패전의 상흔은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법이다. 잠실과 성남 등 당시 남한산성 주변에 거주했던 백성들은 후금의 병사들이 저지른 살인, 강간, 약탈, 납치 등으로 삶의 뿌리가 뽑혀나가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무려 50만이 넘는 조선인들이 후금의 병사들에게 끌려갔고 특히 여자들이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끌려간 여자들은 ‘스스로 죽지않은 것’이 죄가 되어 죽음보다 비참한 여생을 살아야 했다. 조선의 사내들은 제나라의 여자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을 뿐 만 아니라 자신들의 무능 때문에 능욕을 당한 아내와 딸들을 화냥년(환향녀)이라고 멸시하는 비겁까지 저질렀다. 후금의 병사들이 어떤 짓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는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준동을 예방한 후금이 9년 뒤 명나라의 양주를 짓밟은 기록인 ‘양주십일기’를 보면 짐작이 된다.
주화파 최명길

주화파 최명길

 
척화파 김상헌

척화파 김상헌

  북경을 유린한 뒤 양주성에 집결한 명나라 군을 진압하고 성안에 진입한 후금의 병사들이 저지른 만행은 당시 현장에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부지한 '왕수초'의 기록으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일기형식의 이 글은 후금의 군대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입성한 지 대략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45년 봄에, 중국 양주성에서 열흘 동안 일어난 일의 기록이다. ‘양주십일기’는 청나라 통치기간 내내 금서였으나 한두 권이 일본에 전해져 훗날 청나라 말기 일본에 유학한 유학생들이 읽게 되면서 반청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양주십일기의 일부다.
 
후금의 병사에게 끌려가는 조선의 여인.

후금의 병사에게 끌려가는 조선의 여인.

…병사 하나가 칼을 빼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병사 하나는 긴 창을 가로쥐고서 뒤에서 몰고, 병사 하나는 중간에 자리잡고 사람이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였다. 수십 사람을 마치 양떼를 몰 듯, 조금이라도 주춤대면, 즉각 채찍질이요, 혹은 바로 죽여버렸다. 부녀자들은 긴 밧줄에 목이 매여 줄줄이 구슬이 꿰어진 듯하고, (전족으로 발이 작으므로) 한 발 걷고 한 번 넘어지고, 온 몸이 진흙투성이였다. 거리에는 온통 버려진 아기들 천지인데, 혹은 말굽에 짓밟히거나 혹은 사람 발에 밟히거나 하여, 간뇌가 쏟아져 온 땅을 덮을 지경이고, 울음소리가 온 들을 가득 채웠다. 개울 하나와 못 하나를 지나는데, 그 안에 시체가 쌓였고, 팔다리가 서로 포개졌고, 핏물이 흘러들어가 물빛이 울긋불긋 대여섯 갈래가 되었고, 못은 시체로 메워져 평평해졌다…
전쟁기념관 앞 호국 영웅들의 동상.

전쟁기념관 앞 호국 영웅들의 동상.

 
  3일 병자호란을 다룬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이 영화화돼 개봉됐다. 잘생긴 배우들이 혼군 인조와 당시 분열된 집권층의 고뇌를 멋들어진 대사와 함께 표현할 것이다. 묻고 싶다. 불행을 멋지게 표현하면 행복이 되는가. 잘 재현된 치욕의 역사는 영광이 되는가. 우리는 지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그리고 핵무장을 갖춰가는 북한 등에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온 나라가 하나로 뭉쳐 외세의 위협에 대응해도 모자랄 판에 고작 방어용 무기일 뿐인 사드 배치 문제 하나를 놓고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 성 밖에서 수십만의 백성이 타국의 병사들에게 살인, 강간, 약탈, 납치를 당하는 순간에도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려 대책없는 말싸움이나 했던 사람들이 우리다. 그 때 조선의 사대부와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인은 뭐가 다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경제적으로 앞선 나라가 꼭 전쟁에서 승리하라는 법도 없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한강의 기적이 여기까지인지, 우리가 고작 살찐 돼지에 불과한 지는 조만간 드러나게 돼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답은 결국,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답을 만들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게 오늘의 불행이다.
 
김춘식 중앙일보 포토데스크 부국장 kim.choonsi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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