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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보다 신탁을

중앙일보 2017.10.04 00:02
신탁은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상속 방법이다. 국내에선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다. 유언장과 비교해서 신탁의 장점을 소개한다. 
 
세명의 딸과 아들까지 모두 네 명의 자녀를 둔 70대의 홍길순씨. 작년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편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미국에 있는 딸 외에도 주위에 거주하고 있는 두 딸이 가끔 들러 안부도 묻고 식사도 함께하고 있어 혼자만의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하지만 나이든 주변의 친구 중 건강이 좋지 않거나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자신도 조금씩 주변을 정리해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더욱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던 작은 아들이 최근 고전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면 자신의 노후를 대비하는 가운데 아들에 대한 지원도 고려하고 있다. 다만 요즘은 아들에게만 상속하게 될 경우 부모 사후에 유류분을 주장하는 딸들의 소송이 증가한다는 기사를 보면 은근히 걱정이 된다. 부모가 지혜롭게 미리 상속 플랜을 준비해 두어야 자녀들끼리 싸움이 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어떤 재산을 어떻게 이전하고, 얼마만큼의 재산을 본인 노후에 사용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그림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가끔은 금융기관을 방문해 절세를 위한 조언을 받고 있는 데다 고령화시대에 필요한 유언장 관련 설명회도 참석해보곤 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노후생활을 대비한 재산관리가 가능하고, 사용하다가 남는 재산이 있을 때는 내가 지정한 방법과 내용 대로 상속도 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듣게 되었다. 바로 신탁에 의한 상속과 생전 자산관리 방법인데 그 구체적인 플랜을 상담 받고 자신의 큰 근심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탁하면 말 그대로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내가 가진 재산인 현금·부동산·주식 등을 수탁자인 금융기관에 맡기되 관리 방법을 내가 원하는대로 지정함으로써 나의 생전 노후를 위한 자금관리나 사후 상속 방법까지 정할 수 있다. 그럼 신탁의 법적 근거와 유언상속과의 차이점은 뭘까.
 
신탁에 의한 상속관리는 2012년 개정된 신탁법 제59조 유언대용신탁과 제60조 수익자연속신탁을 도입,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일반화된 신탁 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되게 된다. 유언상속과는 상속 설계부터 관리와 집행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른 점이 많다.
 
신탁 계약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공증하는 절차가 필요 없고 금융기관과의 신탁 계약을 통해 그 자체만으로 유언장의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유언장의 경우 유언공증을 하려면 상속 이해관계인이 아닌 제3의 보증인 2명과 공증사무실로 함께 가야 하는데 개인 재산 내역을 밝혀야 하는 것은 물론 유언장 작성이라는 심리적인 저항감이 있어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고령화 시대의 안전장치
 
그러나 신탁 계약은 본인과 금융기관의 계약에 의해 효력이 성립되므로 보증인이 필요 없을 뿐더러 자녀들에게 일일이 알릴 필요도 없다는 게 큰 장점이다.

 
유언장은 본인이 사망하면 상속 받을 사람이 배우자와 자녀다. 결국 피상속인과 상속인의 재산 이전 관계다. 반면 신탁은 본인이 사망하면 배우자에게 상속하되, 그 배우자가 사망할 때까지 수익을 누리다가 사망하면 비로소 자녀들에게 재산을 이전할 수 있는 연속적인 상속 설계가 가능하다. 고령화시대에 배우자에게 재산을 넘겨준 후 다시 자녀들에게 상속하는 연속 유증은 유언장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신탁은 매우 유용한 상속 설계 방법이 될 수 있다.
 
재산관리 면에서도 유리하다. 유언장은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상속인이 재산관리 능력이 충분하지 않을지라도, 즉 장애인이거나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바로 재산이 이전된다. 상속재산의 관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반면 신탁 계약은 미성년자와 같이 재산관리 능력이 없는 자가 상속인이 될 경우를 대비할 수 있다. 신탁계약을 하면서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에서 미성년자인 상속인이 성년이 될 나이까지 재산을 관리하다가 넘겨주는 방식으로 재산 보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상속 받는 자녀가 해외에 거주하여 국내 재산을 직접 관리하기 어려운 상황도 신탁 관리를 통하면 문제가 없다. 특히 고령화로 인한 치매 등이 발생하는 상황을 대비하여 신탁을 활용한다면 재무적 후견인을 곁에 두게 되는 셈이다.
 
상속 집행 과정에서도 차이가 크다. 통상 유언공증을 할 경우 상속인 중 한 사람이 상속 집행인으로 지정된다. 보통 첫째 자녀 또는 피상속인을 옆에서 봉양했던 자녀가 그 역할을 하며, 일반적으로 그 자녀에게 조금 더 많은 재산을 상속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다른 상속인이 분배 몫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경우 상속 집행인을 맡은 자녀는 유언의 집행 과정에서 상당한 고통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고민도 신탁 계약을 활용한다면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 바로 신탁이 상속 집행인의 역할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신탁을 해놓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상속인들, 즉 사후 수익자들에게 신탁 내용을 전달한 후 수탁자인 금융기관이 직권으로 재산의 이전 처리를 해주기 때문에 가족 간의 갈등이 생겨날 가능성이 줄어든다.
 
가족 간 상속 갈등 차단
 
신탁 설계는 어떻게 할까. 상속 설계의 출발은 자산의 정확한 진단이다. 유류분 등 법적 분쟁의 가능성을 점검하는 동시에 세무 솔루션을 찾아야 한다. 해외에 거주하는 자녀에게 수익형 부동산을 나눠주고 싶다면 신탁을 통한 자산관리 서비스를 결합하여 풀어갈 수 있다.

 
우리나라도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18년 14%를 넘는 고령사회가 된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현재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환자가 70만 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사회적 안전장치가 필요한 조건이 되었다. 치매국가책임제와 같은 복지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미국·영국 등의 선진국에서는 이미 신탁에 의한 생전 노후 관리가 보편화되어 있으며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의 경우도 2012부터 성년후견 제도를 뒷받침하기 위한 신탁관리를 시작하고 있다.
 
최근에는 부모의 갑작스런 사고로 혼자 남은 미성년자녀에게 남겨진 보상금 또는 보험금도 신탁을 통해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세월호 사고와 같은 대형 재난에서 생존한 자녀를 위하여 그 보상금은 후견인으로 선임된 친척도 임의로 사용하지 못하고 신탁을 통하여 관리하라는 법원의 결정도 있었다. 신탁을 통해 월 생활비와 계약에서 정한 자금만 지급하고 있다. 가정폭력 피해 아동을 위해 법원에 공탁된 자금도 신탁을 통해 아이가 성년이 될 때 제대로 이전될 것이다. 
 
배정식 keb 하나은행 리빙 트러스트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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