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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일하십니까?”
우리가 지나쳐보던, 우리들의 일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 회는 '덕업일치', 취미를 일로 승화시킨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스압(스크롤 압박)’ 주의! 일상 고수들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으시다면 중앙일보 웹과 앱에서 ‘직업의 정석’을 검색해 주세요.
특별취재팀=김현예·정선언·정원엽 기자, 사진 우상조 기자, 디자인 김은교, 영상 조수진 hykim@joongang.co.kr
 
나는 시 쓰고 노래하는 '딴따라' 강백수입니다  
직업이 뭐냐고? 난 직업란에 작가라고 적는다. 시인? 직업이라는 게 그 일로 어느 정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대한민국에 시인은 무수히 많지만, 시로 먹고 사는 사람은 얼마 없다. 시인이란 타이틀은 내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 중 하나일 뿐, 선뜻 직업이라고 부르기엔 어렵다. 그래서 시인이 아니라 작가라고 적는다.  

가수라고도 쓴다. 2010년 2월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셀프 졸업선물'로 첫 앨범을 냈다. 제작비 80만원.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만들었는데 딱 38장 팔았다. 앨범은 냈지만 그때만 해도 직업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 아는 형이 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중등종합반을 시작으로 고등단과반까지 훑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한달에 600만원을 벌었다.  
한데 뭔가 공허했다. 그래서 돈을 모두 쓰기로 했다. 출근하고, 가르치고, 술 먹고. 슬픈 게 뭔 줄 아나. 그렇게 번 돈을 다 쓰고 놀아도 재미가 없는 거다. 나이 스물다섯에 술먹고 돈쓰고 노는 것이 슬픈 일이 될 줄이야.
 
아이들 학교 방학이 시작되면서 수업시간이 앞당겨졌다. 내게도 ‘저녁 있는 삶’이 주어졌다. 음, 그럼 나도 한 번 버스킹이나 해볼까. 홍대놀이터에 자리를 폈다. 팁박스 없이 공짜로 노래를 불렀다. 아! 돈 십원도 안 되는 이 일은 너무나 즐겁다!
그때부터 가수가 진짜 내 직업이 됐다. 다들 예상하겠지만 돈을 못벌 때도 많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밴드 멤버들과 뚱땅거리고 밤에는 술 마시며 산다. 사실 요즘 숙취로 힘들어하는 시간이 꽤 늘어났는데, 변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많이 얻어오는 편이다(사실 그렇게 합리화를 한다). 술자리 파하고 집에 오면 들었던 이야기를 메모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당 아줌마가 음식 재료 손질하듯 간밤 취중메모를 정리한다. 이 이야기는 시를 써야지, 이건 곡을 만들거야, 이걸로는 산문을 써야지. 이렇게.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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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환갑에 10집 가수를 꿈꿉니다" 나는 딴따라 강백수입니다 
나는 왜 일하는가
“나는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들기 위해 일한다!”

책『사축일기』를 냈다. 시를 쓰고, 노래를 하고, 또 강연도 한다. 내 일이라는 게 딱 한 가지로 표현되질 않는 셈이다. 어찌 보면 내 생활전체가 일이다. 내 일의 장점은 놀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단점은 24시간 놀면서도 일하는 것이다.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때면 조금 불행해진다. 가령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이 고갈됐다는 생각으로 슬럼프가 올 때가 있다.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이 일을 못할까봐 받는 스트레스인 거다.
우리는 행복했던 시절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암투병한 엄마의 이야기를 썼던 ‘뒤통수도 예쁜 그대’도 고마운 경험을 선사했다. 소아암을 앓고 있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님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는데, 한 분이 ‘위로가 됐다’고 해주시더라. 그런 순간들이 참 행복하고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꿈꾸는 단역배우' 박신혜입니다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출연 섭외가 들어왔을 때 박신혜(34) 씨는 주저했다.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방송도 되는데, 이거 전국에 ‘나 잘 못 나가는 배우예요’하고 광고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최고 연기자들이 나오는 곳인데, 한 번 나가보자.’ 박 씨는 지난 5월 동료 단역배우 32명과 함께 제53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공연 무대에 섰다. 다 같이 가수 서영은의 ‘꿈을 꾸다’를 불렀다.  
‘잠시 힘겨운 날도 있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일을 향해 나는 꿈을 꾼다.’  
노래하는 그의 모습 뒤로 자막 한 줄이 떠올랐다. 영화 ‘아가씨’ 중 정신병원 간호사2역 박신혜. 그렇다. 그는 ‘꿈꾸는’ 단역배우다.
박씨는 배우가 되고 싶어 고교 졸업과 함께 전남 순천에서 상경했다. 첫 출연료는 10만원. 하지만 프로무대에 데뷔했다고 생각하니 뛸 듯이 기뻤다. 이후 친구집을 전전하며 계속 연극무대에 섰다. 
많은 배우들은 생활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도 그렇다. 안 해본 일이 없다. 수입이 한달에 700만원이나 되는 아르바이트도 해봤다. 하지만 그 돈을 벌자면 연기할 시간을 내려놓아야 해 그만뒀다. "최소한 생활할 수 있는 만큼만 벌고 배우하고 싶거든요. ‘배우맛’을 봐서 그런가봐요.”  
 
2014년의 일이다. 한참 추운 12월. 코믹극 ‘가정부 옥희님’ 공연을 할 때였다. 주인공 옥희를 맡았다. 무대를 준비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였다. 뇌출혈로 쓰러져 6개월 째 입원 중이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거였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엄마한테 가봐야 하는데, 연극을 해야 했다. 배우라면 관객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동료에게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코믹극을 재미있게 못할 것 같아 극이 끝나도록 입 밖에내질 않았다.  
[사진 박신혜]

[사진 박신혜]

영화 ‘아가씨’ 오디션을 보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박찬욱 감독 작품’이라는 상징성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목욕탕 장면, 마녀 역 대사를 받고 연습을 했다. 2015년 4월, 20분만에 오디션을 마치고 그해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촬영을 했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는데 일본어 공부도 했다. 일제시대가 배경인 영화니 혹 몰라서. 실제 병원에 불이 난 장면을 찍으며 ‘나니고레(何これ, 이게 뭐야)?’란 외마디 대사를 했다. 비록 자막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그 장면을 찍을 때 일본어 발음이 안 좋게 들릴까봐 일부러 기침을 많이 하고 대사를 했다. 영화는 개봉 후 고향에 내려가 혼자 몰래 봤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사진 박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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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나는 '꿈꾸는 단역배우' 박신혜입니다
나는 왜 일하는가
백상예술대상 이후로 오디션을 세 번 봤다. 모두 미끄러졌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이 일을 포기하는 것이 더 힘드니까. 요즘은 재봉틀을 배울까 생각도 한다.   

“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단역이라도 저에게 기쁨이 되고 희열을 주고, 살아가는 의미가 되거든요.저는 꿈이 있어요. 우리 주변에 흔하게 있는 사람을 연기하는 거에요. 특별함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우리 곁에 있는 이모같고 고모같은 그런 친숙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원없이 부어라" 나는 원부술집 사장 원부연입니다 
한눈에도 딱 학교 가는 여학생 모양새다. 자그마한 체구에 단발머리. 가방을 둘러매고 신촌 거리를 부지런히 걷는다. 하지만 여자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모어댄위스키’란 이름의 작은 술집 앞이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가게 문을 여는 여자. 지난달 18일 오전 10시 ‘원부술집’ 사장 원부연(33) 씨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의 이 사람, 한 때 잘 나가던 광고기획자였다. 입사 8년째 되던 해 회사를 때려치우고, 2013년 자기 이름을 딴 ‘원부술집’을 차렸다. 그리고도 모자라 지난해 두 번째 술집 ‘모어댄위스키’를, 최근에느 세 번째 술집 ‘하루키술집’을 개시했다. 네 번째 술집도 자리를 봐두고 밑그림을 그려놨단다. 천생 모범생처럼 보이는 그는 어쩌다 술집 사장님이 됐을까.  
 
대학교 3학년 때 친구 권유로 뒤늦게 연극동아리에 가입했는데, 푹 빠져버렸다. 그의 인생을 휘저어 놓은 동아리 이름은 ‘토굴’. 사회과학대학 건물 계단의 구석자리를 막아서 만든 동아리방이 토굴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TV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로 유명한 나영석 PD가 이 동아리 출신인데,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다”고 소문날 만큼 선·후배 사이가 끈끈했다.  
그는 술자리 분위기 메이커였다. 술을 재미있게 먹는 게 좋아, 이벤트를 준비하고 사회를 봤다. 하다보니 술, 술자리, 사람, 공간을 염두에 두는 게 습관이 됐다. ‘오늘은 어디가지? 누구랑 가지? 그럼 이런 자리였으면 좋겠다’하고 머릿속에 그리곤 했다.  

 
그렇게 술과 학창시절을 보내고 취직을 했는데, 어느 날 비보가 날아들었다. 단골 술집 사장님이 폐업을 선언했다는 소식이었다. 신촌의 ‘아름다운 시절’, 동아리 선후배들과 제집처럼 드나들며 민중가요를 ‘떼창'했던 곳이다.  
추억이 서린 술집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동아리 선·후배와 셋이 맡아 운영해 보기로 했다. 후배가 주로 일을 하고 그는 퇴근한 다음 가게를 지켰다. ‘아름다운 시절’이 잘 굴러가자, 가슴 속에 ‘내 브랜드로 술집 내볼까’하는 로망이 싹텄다. 다니던 광고회사에 사표를 내고 가게를 차렸다. 그의 첫 술집 서울 상암동 ‘원부술집’은 그렇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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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 "원없이 부어라" 나는 원부술집 사장 원부연입니다
나는 왜 일하는가
 나에게 술집이란,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들고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모든 곳이 시작되는 시작점 같은 곳. 사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해서 행복하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술집한다’고 하면 사람들 반응이 뜨뜨미지근했다.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는 예전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사 그만두고 술집 나가는 사람”이란 비하발언(?)을 듣기도 했다. 친정 부모님조차도 “시어머니가 걱정하겠다”며 말렸다. 정작 시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일은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어 죽을 정도다. 장사해서 돈 버는 재미는 오래 안 간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 나는 이 ‘재미’로 일을 한다. 요즘엔 회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면 또 얼마나 즐거울까. 이름도 생각해뒀다. 원부음주문화연구소. 어떤 공간을 만들지 연구하고 고민하는 회사가, 이 원부음주연구소의 핵이 될 거다.  
 
 
나는 청년농사꾼 권두현입니다
[사진 권두현]

[사진 권두현]

권두현씨는 청년농사꾼이다. 영화사 진진이 지난 7월 내놓은 농사를 꿈꾸는 청년들의 세계농장탐방 다큐멘터리 ‘파밍보이즈(farming boys)'의 당당한 주연배우(?)이기도 하다. 
농사꾼의 길, 그 출발선은 고향인 경남 산청 강누마을이었다. 부모님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위로 누나가 셋이나 있는데, 부모님은 아들인 권두현만 밭으로 논으로 불러댔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권노예’라고 불렀다. 놀지도 못하고 노예처럼 하루종일 일만한다고. 학창시절 ‘한 주먹’ 했던 몸인데 별명이 권노예라니. 굴욕이 따로 없었다. 농사가 싫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춤도 추고 잘 놀던’ 학생 권두현은 정신을 차렸다. “꿈이 뭐냐. 사내자식이 꿈을 한 번 가져봐야지!” 매형의 한 마디가 자극이 됐다. 뭔가 해보고 싶었다. 
경남 산청에서 무려 부산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했는데, 놀 수가 없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학점 4.0을 넘기긴 했는데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올랐다. 구불구불 마을을 크게 휘감아 도는 강줄기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안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재미있게 살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권두현은 ‘말 안 듣는 아들’답게, 덜컥 진주에 있는 경상대 원예학과로 편입을 했다.  
 
유지황(31)씨와 김하석(30)씨와 뭉친 건 6월이었다. 호주에서 만나 전세계 농장을 함께 돌기로 했다. 영화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도 이때였다. 그렇게 세 사람은 1년 반 동안 네덜란드·프랑스·이탈리아 등 12개국 농장 35곳을 돌았다. 우프(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라는 유기농 농장 네트워크에 속해있는 곳들을 찾아갔다. 농장에서 하루 4~6시간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았다.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는다고 하면 새벽에 일어나 해질 때까지 일만 하는 걸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네덜란드는 달랐어요. 일하러 간 우리 셋 말고도, 농장에 찾아온 인턴, 옆집 아줌마 10여명이 둘러앉아 식사를 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예닐곱명이 내리는 거에요.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아픈 분들이었요.”
 
농장을 찾은 이들은 양치기를 하면서 심리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국가가 이런 농장을 ‘케어팜(care farm)'으로 지정한다는 설명에 권두현씨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꾼이 따로 있고, 1시간 일하고 1시간 쉬면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사꾼과 농장. 꿈에 그리던 곳이 아닌가.  
[사진 영화사 진진]

[사진 영화사 진진]

‘온나 농장’으로 고마 온나!
2015년 9월 귀국해 바로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부모님은 논농사 외에 딸기농사를 지으셨다. 딸기는 밥대신 먹을 정도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다. 당연히 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최악이었다. 절치부심 공부를 시작했다. 
 
“아직 결혼을 안했는데, 자식 키우는 기분이 들어요. 엄마 딸기 하나에서 자식 30개가 나오거든요. 이 아기들을 잘 키우는 게 제 일이에요. '우리 애들'도 세끼 먹고, 추우면 따뜻하게 해주고, 더우면 시원하게 해줘야 잘 커요. 생물이니까 관심을 받는 만큼 크죠. 관심을 안주면 성장 속도도 느리고 잎이 덜 자라더라고요.”
 
올해 딸기 농사 3년차에 접어든 권두현씨는 최근 농장 이름을 ‘온나’라고 지었다. “친구야 놀러 온나(와라)! 일하러 온나! 술 무러(먹으러) 온나! 내 보러 온나! 좋잖아요. 온나 농장으로 놀러 한 번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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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 나는 딸기 키우는 '청년 농사꾼' 권두현입니다
 
 
나는 '비정규 육체파 제주 일꾼' 김태호입니다
[사진 김태호]

[사진 김태호]

올해 33살 김태호 씨. ‘하루 벌어 하루 노는 육체파 비정규 일꾼’, 이게 그의 직업이다. 집 짓기, 입주 청소, 이사 도우미, 귤 따기, 인형 탈 쓴 행사 도우미 등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일을 한다. 요즘 유행하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족’ 아니냐고? 그는 그렇게 불리는 게 불편하단다. “난 그냥 현실과 원하는 것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한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거다.  
 
원래부터 ‘몸 쓰는’ 걸 좋아했다. 10대 시절 2년 간 신문 배달을 한 건 매일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였다. 3년 넘게 직장에 다녔던 건 지하 헬스장 때문이었다. 결국 헬스 트레이너로 전업했고 내친 김에 서울 모처에 헬스장을 차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엎어졌다. "이제 뭐하나 싶었는데 제주가 떠올랐어요. 더 늦기 전에 제주에 가서 좋아하는 서핑을 실컷 해보자 싶었죠."
 
제주에서 보름 정도 몸을 써서 일하면 100만원 정도를 손에 쥔다. 살아보니 그 정도면 먹고 마시고, 제주 생활의 필수품인 차도 몰 수 있었다. 그는 그래서 아무리 일이 많이 들어와도, 한 달에 보름 이상은 일하지 않는다. 나머지 보름은 서핑도 하고 낚시도 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그에게 일이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다.
[사진 김태호]

[사진 김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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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의 정석] 나는 '비정규 육체파 제주 일꾼' 김태호입니다
나는 왜 일하는가
 일은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한 땅이에요. 파서 다져놓아야 그 위에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거에요. 근데 땅 파는 게 전부가 아니죠. 건물을 올리는 게 더 중요해요. 나답게 사는 거요.
 김태호 씨가 한 달에 보름 일하고 나머지 보름은 서핑을 하는 이유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반이 그에겐 ‘보름의 노동’인 것이다. 사실 태호 씨에겐 일과 놀이를 굳이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저는 직업인이에요. 직장인 하곤 다르죠. 뭘 하든 제가 주체가 되어서 선택해요.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원하지 않을 땐 일하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저한텐 일과 놀이가 큰 차이가 없어요. 일을 하고 싶을 땐 일을 하고, 서핑을 하고 싶을 땐 서핑을 하니까요. 이게 서울에서 직장 생활할 때랑 가장 큰 차이 같아요.
 
 
 
 
나는 LP판 만드는 남자, 하종욱입니다
하종욱(47) 대표와 마장뮤직의 인연은 2010년 시작됐다. 마장뮤직의 전신은 마장스튜디오. 1968년 세워진 마장스튜디오는 가수 조용필과 나훈아, 산울림 등의 작품을 녹음했던 곳이다. 2010년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인수하며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 무렵이었다. 마장뮤직에서 하종욱에게 "LP 공장을 짓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처음엔 안 된다고 했어요. 돈이 안되는 일이고, 성공 못한다고요. 국내에 남아있던 마지막 LP 공장이 문 닫은 게 2004년 일이예요. 그 정도로 LP는 소비자들에게 잊혀진 것이었어요.”
 
하지만 2014년 6월 그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사람들이 LP의 기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2011년만 해도 1년 동안 팔린 LP는 고작 1만여 장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만에 판매량이 20만장 대로 뛰었다.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 그는 서울 성수동 공장지역 한 복판에 ‘바이닐 팩토리’를 세우는 일에 합류하기로 했다.국내 유일의 LP 공장이었다. 바이닐(vinyl)은 LP의 원재료인 폴리염화비닐(PVC)을 가리키는 단어로, 외국에선 LP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그는 마장뮤직의 월급쟁이 대표이사가 됐다.  
 
LP공장을 다시 돌리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공장의 핵심은 기계인데, 기계가 낡아 양질의 생산품이 나오질 않았다. 거기다 외국산이라 부품 구하기도 힘들었다. 하종욱은 알음알음 전문가를 영입해 기계를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 6월 영업을 개시했다.  
 
“사람들이 물어요. 왜 다시 LP공장을 열었냐고요. 시대역행적이라는 이야기죠. 저는 음악감상이라는 ‘행위’를 알리고 싶어서 이 일을 선택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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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 '아날로그 음악의 반격' 나는 LP 만드는 하종욱입니다
나는 왜 일하는가
 확인하고 싶어서 일을 하는 것 같아요. 나의 노력과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 어딘가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서요. 거창하게 말하면 내 한계와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어요.
요즘 회사 직원들과 함께 꾸고 있는 꿈이 있어요. ‘판가게’를 차리는 거에요. 지금 우리 시대의 대세는 디지털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속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소통하는 곳을 만들고 싶어요. 상상만해도 행복해요. 기약 없는 약속이기도 하고 몽상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출발이 되리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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