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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베트남·필리핀서 온 우렁각시 “달 뜨면 나타나 송편 빚어요”

중앙일보 2017.10.03 01:00 종합 18면 지면보기
“텐 킬로스 무가스 일라가이.”(쌀 10㎏만 더 덜어주세요.) 지난달 24일 오후 전남 영광군 영광읍 신하리 솔담모싯잎송편 공장. 필리핀 출신 이주여성인 김수진(42·여)씨가 동료인 지나린(37·여)씨에게 필리핀 현지어인 ‘타갈로그어’로 말했다. 모싯잎송편의 반죽용 재료인 쌀을 저울 위로 올려달라는 주문이었다. 모싯잎송편은 굴비로 유명한 영광 지역의 특산품 중 하나다.
 

연간 매출 300억원 영광 특산품
업체들 명절 땐 일손 모자라 진땀

낮엔 영어교사, 요양보호사 활동
4명씩 조 짜서 야간·휴일에 알바

20㎏ 쌀 12포대 4시간이면 빚어
많게는 300만원 이상 목돈 벌어

김씨의 말을 들은 지나린씨는 싱크대에 미리 불려놓은 쌀을 조심스레 저울 위로 옮겨 담았다. 저울을 바라보던 김씨는 쌀의 무게를 알리는 눈금이 10㎏을 가리키자 “오케이(OK)”를 외쳤다. 김씨는 “송편의 주재료인 쌀과 모싯잎의 비율을 10(10㎏) 대 2(2㎏)로 맞춰야만 떡이 찰지고 맛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곁에 놓인 초록색 떡 반죽을 들고 송편을 빚고 있는 여성들 쪽으로 향했다. 쌀과 모싯잎을 섞어 만든 반죽을 ‘성형기’에 넣어주기 위해서였다. 반죽 안에 콩(동부)이나 깨를 넣어주는 성형기 앞에서는 여성 두 명이 부지런히 송편을 빚고 있었다. 기계가 떨어뜨려 주는 뭉툭한 떡 뭉치의 가장자리를 손으로 눌러 송편 모양을 내는 작업이다. 영광 모싯잎송편은 보통 검은콩이나 깻가루를 넣는 일반 송편과 달리 동부를 삶아 넣는 게 특징이다.
 
지난달 24일 전남 영광군 신하리 솔담모싯잎송편 공장에서 필리핀·베트남 출신 이주여성들이 조영미(왼쪽 둘째) 대표와 함께 송편을 빚고 있다. 영광의 경우 200여 곳에서 3360t 의 송편을 생산한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달 24일 전남 영광군 신하리 솔담모싯잎송편 공장에서 필리핀·베트남 출신 이주여성들이 조영미(왼쪽 둘째) 대표와 함께 송편을 빚고 있다. 영광의 경우 200여 곳에서 3360t 의 송편을 생산한다. [프리랜서 장정필]

“박 라이 마이 송편.”(송편 기계를 다시 켜줘요.) 송편을 빚던 베트남 출신 원지영(39·여·웽두이영)씨의 말에 노유빈(31·여·노티홍용)씨가 재빨리 성형기의 전원을 켰다. 쟁반 모양의 작업대 위에 있던 떡 뭉치를 모두 송편으로 만든 것을 보자 다시 기계를 돌려 떡 뭉치를 떨어뜨려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원씨와 노씨는 성형기에서 나온 떡 뭉치를 순식간에 반달 모양의 송편으로 만들었다. 1분에 30여 개씩 빚어내는 손놀림에선 두 사람이 이주여성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도 능숙하게 송편을 빚는 여성들은 각각 10여 년 전 베트남에서 영광으로 시집왔다. 원씨는 “머나먼 타향에서 같은 고향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돈도 벌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영광 지역에는 추석이나 설날이 다가오면 유난히 바빠지는 이주여성이 많다. 명절을 전후로 영광의 특산품인 모싯잎송편을 만드는 여성들이다. 주로 베트남·필리핀 출신인 이주여성들은 4명 정도씩 자체적으로 팀을 꾸려 송편을 빚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들은 송편업체 주인이 미리 약속한 양에 맞춰 쌀을 불려놓으면 조별로 편한 시간대에 찾아와 떡을 만들어놓고 간다. 가게 사장이 미리 약속한 양의 쌀만 물에 불려놓으면 방아를 찧어 송편을 빚고 청소를 한 뒤 돌아가는 식이다.
 
업주들 사이에서는 이들 이주여성이 ‘우렁각시’로 통한다. 설화 속 우렁각시처럼 일을 척척 해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명절 때 주문 물량이 폭주하는 상황에서 오전에 출근만 하면 택배로 보낼 송편이 모두 만들어져 있을 정도다. 현재 업체 규모가 큰 곳들을 제외하고는 60~70%의 업체에서 이주여성을 쓰고 있는 것으로 영광군은 파악하고 있다.
 
솔담모싯잎송편 공장에서 김수진씨(왼쪽)가 동료인 지나린씨와 송편을 포장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솔담모싯잎송편 공장에서 김수진씨(왼쪽)가 동료인 지나린씨와 송편을 포장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여성들은 주로 야간이나 주말·휴일 등을 이용해 송편업체를 찾아온다. 평일에는 대부분 직업이 있거나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여가나 휴식 시간을 활용해 일을 한다. 영광의 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원씨는 “병원 근무시간을 피해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해 송편을 빚는다”며 “송편 ‘알바’를 시작한 지 3년 정도가 됐는데 아이들을 위해 돈을 더 쓸 수 있다는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지나린씨는 같은 고향인 필리핀 민다나오 출신인 김수진씨의 손에 이끌려 송편 일을 시작했다. 한국 생활 15년째인 김수진씨는 4명이 한 조인 송편팀을 이끄는 ‘반장’이다. 원씨 등 베트남 동료 2명과는 2년째 함께 일을 하고 있어 눈치만 봐도 반죽이나 동부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 정도다. 지나린씨는 “영광에서 15분 거리인 전북 고창의 어린이집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데 ‘반장님’의 요청으로 틈나는 대로 송편 알바를 한다”며 “힘은 들지만 떡 만드는 일이 재미있고 명절 때 쓸 생활비가 더 생겨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영광의 송편업체들은 4~5년 전만 해도 명절이 다가오면 주문량을 대지 못해 발을 굴렀다. 모싯잎송편이 10여 년 전부터 유명세를 타면서 전국에서 구매가 폭주한 것이다. 당시 업주들은 명절에만 일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상시 직원들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국 여성들의 경우 이주여성에 비해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도 큰 부담이 됐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업체에서는 명절 때마다 부부나 가족이 모두 달라붙어 주문량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조영미(50) 솔담모싯잎송편 대표는 “추석만 다가오면 부부가 밤을 새워가며 송편을 빚는 곳이 많았는데 이주여성들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다”고 말했다.
 
송편을 만드는 이주여성 역시 명절을 전후로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점에서 만족감이 크다. 평소 직장을 다니며 150만~200만원의 수입을 올리다가 많게는 300만원 이상의 목돈을 더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조당 20㎏짜리 쌀 12포대(240㎏)를 송편으로 빚을 경우 총 24만~26만원을 받는 식으로 일을 한다. 일손이 빠른 팀은 4시간이면 일을 마치는 반면에 못하는 팀들은 7~8시간씩 걸리기 때문에 “시간이 돈”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일이 많을 때는 20㎏짜리 3~4포대를 추가로 빚을 수도 있어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일을 한다.
 
모싯잎송편은 영광 지역 130여 개 업체가 연간 3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특산품이다. 물에 불린 쌀에 삶은 모싯잎을 섞어서 빻은 가루를 반죽해 빚는 송편을 말한다.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다이어트와 항산화 작용을 한다는 게 입소문을 타면서 연중 전국으로 팔려나가는 웰빙식품이 됐다.
 
김준성 영광군수는 “모싯잎송편은 300억원 이상의 자체 매출 외에도 모싯잎·동부·쌀 등 송편 원재료의 안정적인 재배 기반을 돕고 지역민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영광=최경호 기자 ckh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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