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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시간에도 갑질이 있다

중앙일보 2017.09.28 01:57 종합 34면 지면보기
박신홍 중앙SUNDAY 차장

박신홍 중앙SUNDAY 차장

지난 21일 국회 본회의는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킨 자리였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인준 투표가 예정됐기 때문이었다. 사법부 수장 공백이란 초유의 사태를 앞두고 갑론을박이 오가던 터였다. 하지만 정작 오후 2시가 돼도 본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7분 뒤 정세균 국회의장은 “어제 인사청문특위에서 심사보고서가 채택됐는데 아직까지 제출되지 않았다. 현재 최종 수정 중이라니 잠시 대기해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허걱. 이 중차대한 회의에 시간 하나 못 맞추다니. 제시간에 와 있던 동료 의원뿐 아니라 방청석을 찾은 시민과 전국 각지에서 언제 속보가 뜨나 궁금해하던 국민의 귀중한 시간을 모조리 빼앗고 있었다. 요즘 말로 시간 도둑, 시간 갑질에 다름 아니다. 결국 본회의는 보고서가 도착한 2시24분에서야 열렸다. 24분이 뭐 대수냐고? 일하다 보면 그 정도는 늦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맞다. 평소 1~2시간 늑장 개회가 다반사였던 데 비하면 엄청 진일보했다. 칭찬할 일이다.
 
기왕 늦을 거면 생색이라도 내자. 총리나 장·차관이 “중요한 회의가 있어 좀 늦겠다”고 하면 호통만 치지 말고 “얼마든지 그러세요. 국민을 위하는 일인데 그쪽 먼저 챙기셔야죠”라며 쿨하게 받아주자. 본회의장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는 의원들에겐 “협치도 안 되는데 이참에 여야 의원들끼리 친교의 시간을 가지세요”라는 장내 방송도 틀어주자. 본회의장 방청석은 아예 없애자. 시민들이 괜히 국회 왔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직장인이든, 자영업자든 제때 일을 끝내기 위해 늘 촌각을 다툰다. 또 기어이 시간에 맞춘다. 안 그러면 생업이 위태로우니까. 그런데 국회에선 오후 2시 본회의가 잡히면 오후 1시반쯤 의원총회를 소집한다. 그러곤 오후 3~4시가 돼서야 본회의장에 들어선다. 국민 무서운 줄 모르는, 국민의 종복이란 사실을 철저히 망각한 시간 갑질의 반복이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명감독 조세 무리뉴는 최근 절묘한 타이밍의 선수 교체와 전술 변화로 연승 가도를 달리고 있다. 비결을 묻자 그는 중요한 경기 땐 시계를 20분 빨리 맞춰놓는다고 했다. 스스로를 압박하기 위해서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국민에게 공지한 본회의 시간도 지키지 못하는, 아니 지킬 생각조차 않는 정치인들에게 책임·협치·성과를 요구하는 건 연목구어다.
 
오늘날 대의민주주의는 대표성과 책임성이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돼 있다. 책임 없는 대표는 민주주의의 방해꾼,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마침 오늘 오후 2시에도 본회의가 잡혀 있다. 10분 일찍 착석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정해진 시각에 한번 개회해 보라.
 
박신홍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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