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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심재명 제작자가 말하는 배우 나문희

중앙일보 2017.09.26 13:54
  '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스피크'

[매거진M] 나옥분 할머니, 나문희 배우를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 ‘아이 캔 스피크’(9월 21일 개봉, 김현석 감독)에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 사연부터 말해야겠다. 지난해 겨울 어느 휴일 오후, 이은 대표로부터 ‘I Can Speak’란 제목의 시나리오를 건네받아 읽었다.
 

나옥분이 나문희를 만난 건
행운이자 축복

구청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간섭하는 밉상 할머니와 원칙을 내세우며 사사건건 할머니와 부딪히는 뺀질이 9급 공무원이 투닥거리는 코미디가 이어지다가 극 중반이 조금 지나 이야기는 놀라운 비밀을 풀어내고 있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깨비 할매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많은 이들이 기피하는 이 할머니가, 사실은 가슴 깊이 지독한 슬픔과 아픔을 60년 넘게 숨겨 온 위안부 피해자였다니.
 
2014년 CJ 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여성가족부가 후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 당선작이라는 사실은 이야기의 원안자이자 영화를 기획한 영화사 시선의 강지연 대표를 만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민원왕’인 할머니를 통해 분노와 슬픔을 전제로 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발랄하게 비틀어 냈다”는 당시의 심사평은 정확하게 이 시나리오의 정체를 표현하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스피크'

시나리오를 먼저 읽고 소개한 리틀빅픽처스는 투자와 배급을 책임지는 제공사로 나섰다. 이후 김현석 감독이 각색 작업을 한 후 이제훈 배우가 캐스팅됐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에 앞서 나옥분 역엔 이미 나문희 배우가 내정돼 있었다. 강지연 대표의 선택에 어느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감독의 말대로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나문희라는 오직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몇 달 후 배우들이 함께 모여 시나리오를 읽는 워크숍 자리에서 나문희 배우가 읽어 내려가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현장에 있던 우리 모두는 웃고 울었다. 공동 제작사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드디어 우리는 밉살스럽기도 하고, 때론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깊은 눈빛과 또렷한 음성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용감한 나옥분 할머니를 나문희라는 대배우를 통해 만나게 됐다.
 
'디어 마이 프렌즈' / 사진제공=tvN

'디어 마이 프렌즈' / 사진제공=tvN

1996년 노희경 작가가 쓴 MBC 특집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자궁암에 걸린 채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 역의 나문희 배우는 압도적이었다.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고부의 애절한 관계 속에서 지독하게 현실적으로 표현해 낸 그의 연기는 많은 이들을 울렸다. 같은 작가의 최근작 ‘디어 마이 프렌즈’(2016, tvN)에서는 노년의 삶의 신산함을 더할 나위 없이 보여주었다.
 
‘호박고구마’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시트콤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 MBC)도 있다. 능청맞고 억세고 엉뚱하고도 정깊은 문희 역을 통해 그는 스스로 얼마나 뛰어난 코미디 감각을 지녔는지 제대로 입증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눈과 코와 입과 몸짓이 모두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1961년 MBC 라디오 공채 성우 1기 출신답게 뛰어난 발성과 정확한 발음 또한 그의 독보적 능력이다.
 
'거침없이 하이킥'

'거침없이 하이킥'

노희경 작가의 에세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북로그컴퍼니)에서 나문희 배우가 작가에게 했다는 말이다. 
 

“너무 잘난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놀지마. 책 많이 읽어. 버스나 전철 타면서 많은 사람들을 봐.
재래시장에 많이 가. 그곳에서 야채 파는 아줌마들을 봐. 할머니들 손을, 주름을 봐봐. 그게 예쁜 거야. 대중목욕탕에 가.
대본 제 때주는 작가가 돼. 우리 자주 보지 말자. 그냥 열심히 살자, 희경 씨.”

 
미루어 짐작하건대 나문희라는 사람과 배우로서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들이다. 노희경 작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가 배우 나문희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욕심 많은 배우라고 대답할 거예요. 그리고 또 누가 인간 나문희를 말하라면, 저는 화면에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던 인간이라고 답할 거예요.”
 
  M232_아이 캔 스피크

M232_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스피크’에서 생선전을 부치는 나옥분 할머니의 주름진 손, 영어 선생이 된 민재(이제훈)의 말을 또박또박 받아 적으려고 연필을 꼭 그러잡은 손가락, 팔을 휘휘 내저으며 시장통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걸음걸이. 그러면서도 미 의회 청문회에서 “내가 바로 증거”라고 똑똑히 말하며 자신의 상처를 용기 내어 드러내는 모습은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실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는 한 매체에서 “옥분은 입체적이고, 아주 재밌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 문장은 우리가 나문희라는 배우를 수식하는 데에도 맞춤한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히 극을 이끌어 가는 여성 주인공의 영화가 희귀한 이때,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나옥분이 나문희를 만난 건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심재명, 명필름 대표.

글=심재명 명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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