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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불로 한 점 한 점 태운 한지의 오묘함

중앙일보 2017.09.26 01:00 종합 22면 지면보기
‘페이징’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 옆에 선 김민정 작가. 유럽에서 먼저 호평을 받아왔다. [사진 현대화랑]

‘페이징’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 옆에 선 김민정 작가. 유럽에서 먼저 호평을 받아왔다. [사진 현대화랑]

한지를 오리거나 얇게 자른다. 테두리를 향불로 한 점 한 점 태운다. 마치 명상과도 같은 정성스런 과정을 거쳐 한 조각 한 조각 첩첩이 붙여간다. 홍익대를 졸업하고 유럽에서 활동해온 김민정(55) 작가의 기법은 작품을 아주 가까이 보지 않고는 알아채기 힘들다. 멀리서 보면 기하학적 형태나 조형적 리듬감부터 눈에 들어온다.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 ‘종이, 먹, 그을음:그 후’는 90년대 초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작가가 26년 만에 국내 상업 화랑에 여는 개인전이다.
 

김민정 ‘종이, 먹, 그을음:그 후’전
기하학 형태, 조형적 리듬감 뒤엔
명상과도 같은 정성스러운 과정

전시장에 자리한 또 다른 신작 ‘페이징’ 시리즈는 붓으로 먹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마치 서예를 하듯 힘차게 내리그은 형태가 한결 자유로운 동시에 동양적으로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매번 각각의 형태에 그림자라도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 테두리 안쪽을 태워 속을 비우고 다른 한편에선 온전한 형태를 다시 채워 미묘하게 어긋나도록 종이를 겹쳤다. 전시 개막 뒤 프랑스의 집으로 돌아간 작가에게 전화했다. 그는 지금껏 구축한 예술세계의 공을 종이, 다름 아닌 한지에 돌렸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인쇄소를 했는데 자르고 남은 종이로 딱지 같은 걸 만들고 놀았어요. 우리는 종이를 잘 알아요. 서양사람들은 한지 같은 건 더더구나 모르죠. 다만 서양에 있으면서 미학적 형상은 그래픽적인 것도 보고 해서 서양의 미학이 들어간 거죠.”
 
그는 한지를 두고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그 자체가 미니멀 아트”라며 “제가 그걸 마구 다루는 가해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지가 꼭 와인 같아요. 닥나무라서 가물 때, 비가 많이 왔을 때, 종이 성격이 다 달라요. 수십 년 쓰다보니 알게 됐죠.” 촛불 대신 향불을 쓴 것도 질 좋은 얇은 한지에 가는 선을 구현하고 싶어서였다. 두께가 다양한 한지를 붙이는 일은 물처럼 푼 풀에 둥둥 띄워 핀셋으로 집어 옮기는 조심스런 과정이란다.
 
한지는 한국 올 때마다 한껏 사가되, 배접은 학교 시절 배운 것을 살려 직접 하거나 작가의 고향(광주)에 보내 배접을 배우게 한 유럽인 조수의 손을 빌린다. 향불 대신 단색의 색채만 활용, 농담을 달리해 첩첩이 칠한 시리즈 ‘마운틴’과 ‘페이징’시리즈를 포함, 그의 작품 세 점이 최근 영국박물관 한국관에 소장됐다. 내년초에는 영국의 이름난 갤러리 화이트 큐브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전시는 10월 8일까지.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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