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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 - 유실된 인간, 혹은 가능한 역사 너머

중앙일보 2017.09.25 01:00 종합 29면 지면보기
유실된 인간, 혹은 가능한 역사 너머 -조해진과 최은영의 소설이 말해주는 것들 : 이병국 
 
1. 따로 또 같이

 
 2017년 5월, 우리는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삼십 년 전의 6월처럼, 우리는 새롭게 시작하는 가능성을 시대의 감각으로 재정립하며 주도적 역량을 사회적 계기로 삼아 과거와는 다른 현재를 모색하려 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현재는 과거의 연속성 속에서 이해되고 고찰되며, ‘새 시대’는 지난 시대의 반대급부로 의미가 구축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급히 ‘새 시대’를 선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라는 것이 크라카우어(S. Kracauer)의 말처럼 시간의 균질적인 흐름의 산물이 아닌 자기의 고유한 시간을 여러 배열체들의 사건들을 통해 정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어쩌면 오늘의 이 출발선은 단순히 강물의 고고한 흐름처럼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비약과 단절 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어떠한가. 80년대적인 거대 담론이 87년의 시민적 역량에 의해 붕괴되고 90년대적인 포스트모던의 감각과 더불어 다양한 단절이 시도된 상황 속에서, 문학은 그 방향성을 상실하고 스스로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고투하였다. 그러나 오해와 오독의 과잉으로 내달린 90년대 소설은 80년대적인 것과의 단절을 의도함으로써 역설적으로 80년대적인 것에 매몰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80년대적인 역사에 대한 문학적 단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가능해졌다. 그것은 고시원과 반지하 셋방을 전전하는 인물들을 통해 미시적 역사를 기록하려는 일군의 작가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역사로부터 탈각된 무력한 자아들의 소외를 사회 구조와 병치하여 그려내었다. 이는 치열한 삶의 장면화를 통해 동시대의 존재가 가장 첨예하게 고민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적 시도는 그들이 지켜보고 있던 존재들의 좌절과 나란히 걸어가는 것 이상은 되지 못했다. 환멸은 여전하였으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가 지닌 변화의 계기는 비대칭적 사회 경험의 폭 만큼이나 그 간극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결국 그것은 부재한 상태로 부정되어야만 했던 시대의 연속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건은 지속과 단절 속에서 유영하듯 삶을 고통 속에 던져놓는다. 그것을 견뎌내는 안간힘으로 2000년대의 문학이 존재했다면, 그러한 절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오히려 2010년대의 문학은 새로운 삶의 지향을 꿈꾼다. 불합리와 부조리를 경험한 2010년대의 문학, 특히 소설은 현대사적 비극을 지금의 서사로 끌고 들어온다. 그럼으로써 연속과 단절이라는 역설적 아이러니를 자양분으로 삼아 환멸을 새로운 역사의 생성 가능성으로 전도시킨다. 이 글은 그것을 조심스레 타전하는 시도이다.  
 
 
 2. 역사의 분리와 인간으로의 수렴
 
 부조리한 혹은 불합리한 시대를 지나오면서, 개인은 파편화된 존재로 사회의 밑바닥에서 자기모멸을 견뎌야만 했다. 깨어진 거울 조각들처럼 파편화되어 온전히 자기 자신을 비출 수도 없는 시기를 경험하며, 2010년대의 소설은 그 거울 조각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했다. 그 중에서도 현재의 삶을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붕괴하는 존재의 결을 회복하려는 조해진과 최은영의 소설 이 글은 조해진, 『빛의 호위』, 창비, 2017. 최은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최은영, '그 여름',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7.을 대상으로 한다. 이후 인용한 부분은 쪽수만 표기한다.  
은 단 한 사람의 손 내밂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며 희망이 발아하는 시대를 열고 있다.  
 이미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를 통해 개인과 역사, 시대의 관계를 성찰했던 조해진은 『빛의 호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시대적 조류의 한 줄기를 재현한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빛의 호위', 27쪽)이지만, 그것은 거창하고 숭고한 행위로 인해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카메라’ 하나를 선물로 주는 일, 아니 어쩌면 “어쩔 수 없이”(24쪽) 찾아가야만 했던 그 걸음에서부터 ‘위대한’ 일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사소한 관심은 연민을 거쳐 공감으로 나아가며, 그것이야말로 저 파편화된 존재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그것이 국가의 폭력으로 말미암은 일이라면 더욱 더, 개별적 존재들에 대한 서로의 공감은 그들 자신이 역사적 존재로서 착취되고 억압된 존재임을 깨닫게 하며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정동을 확보하게 만든다.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동백림 사건을 다루고 있는 '사물과의 작별'과 '동쪽 伯의 숲'은 역사적 지속과 세대 간 단절의 변증법적 작용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더 나아가 그로 인해 사람을 살게 하는 위대한 힘의 생성을 재현한다.  
 
 실제로 유실물에는 저마다 흔적이 있고, 그 흔적은 어떤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나를 유혹할 때가 많다. 다이어리나 카메라는 비교적 세밀하게 그 이야기가 기록된 경우이고 녹슨 반지, 굽이 닳은 구두 한짝, 세탁소 라벨이 붙어 있는 비닐 안의 와이셔츠 같은 것은 어느정도 상상력을 동원해야 완성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이야기는 유실물을 사용한 누군가의 손때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누군가를 잃어버린 유실물은 선반의 고정된 자리에서 과거의 왕국을 홀로 지켜가는 것이다.(73쪽)
 
 인용한 부분은 '사물과의 작별'의 ‘나’가 일하고 있는 유실물센터의 한 풍경을 묘사한 것이지만, 알츠하이머에 걸린 고모의 시간을 묘사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군을 만났던 “그 봄밤의 태영음반사”(69쪽)에 머물러 있는 고모는 서군이 보관해달라고 했던 일본어 원고 뭉치를 자신이 기관원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에 서군이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는 죄책감을 한 평생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고모의 죄책감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든, 그녀 자신이 서군과 관련된 맥락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에 근거한 것이든, 중요한 것은 평생 그 죄책감을 짊어진 채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분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모와 서군을 둘러싼 국가 폭력의 결과이지만, 폭력이 역사화/정치화되면서 방치된 고모는 “향유할 기억과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채 ‘유실물’로 단절된 세계의 이야기를 견디고 있는 셈이다. 이는 '동쪽 伯의 숲'의 한나와 안수 리의 상황에서 반복된다. 일본 유학생을 간첩단으로 둔갑시켰듯이 국가는 독일 유학생과 광부들을 간첩으로 내몰아 공포 정치를 펼쳐 체제를 유지, 강화한다. 안수 리의 실종은 그를 간첩으로 오인하게 하고 한나로 하여금 전쟁을 지지하던 증조부와의 한때를 기억하게 한다. 희수와 발터의 서간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핵심은 현재의 인물들에게 유리된 역사가 실은 지속되어 온 시간의 결이라는 것, 지금-여기 여전한 상태로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희수와 발터가 안수 리를 찾아 한나의 죽음을 전하고자 하는 행위는 “거짓을 진실로 되비추는 이상하고도 슬픈 문”(105쪽)을 열어 저 ‘유실물’의 이야기를 되찾아주고자 하는 공감의 지점에 닿아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 무력하기만 한 시절을 용서할 수 없던 안수 리처럼, 시가 써지지 않는 환멸의 시대를 살고 있는 희수가 자신의 환멸을 이겨내도록 하는 손 내밂을 수락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록되지 않은 단절의 역사를 지속된 현재로 불러와 그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시간의 곁을 나란히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다른 이야기를 생성해 낼 가능성을 문학이 타전하는 방법은 아닐까. “그 누구의 배웅도 없이, 따뜻한 작별의 입맞춤과 헌사의 문장도 없”(83쪽)을 지라도 저 망각되어 가는 ‘과거의 왕국’을 홀로 지켜가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데 없어도 무방한 덧없는 조각”(87쪽)의 존재가 보내는 ‘조난신호’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단절과 지속이라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유기물’로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공감의 영역으로 수용하려는 조해진처럼 최은영 역시 그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서 사회적 사건이 불러온 환멸을 극복할 수 있는 또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중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는 인혁당 사건을 배면에 깔고 엄마와 순애 이모의 삶의 흔적을 통해 유실된 인간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순애 이모는 할머니의 이종사촌 언니의 딸로,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지고 같이 살던 할머니도 돌아가신 후에 엄마의 집으로 와 일종의 식모로 같이 생활하게 된다. 열여섯 살의 이모와 열한 살의 엄마는 삶의 소중한 인연이었으나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을 빗장을 닫아걸”(116쪽)었다. 사회와 역사,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엄마와 달리 순애 이모는 그 폭력으로 인해 삶이 황폐해진다. 군사 독재 시대의 간첩 조작 사건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다. 침묵을 강요받고 폭력을 수용한 채 살아가도록 만드는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단절을 불러왔다. 엄마는 이모의 황폐한 삶의 이면이 지닌 진실보다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삶의 구차함에 좀 더 거부감을 느낀다.  
 
 엄마는 살얼음판을 딛듯이 이모의 상처가 닿지 않은 마음들만을 디디려 했고 이모는 엄마가 이모를 조금이라도 가여워할까봐 애써 아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심지어 이모가 안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조차 몰랐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114쪽)
 
 서로에 대한 배려는 오히려 존재를 ‘유실물’이 되게 한다. 또한 그것은 이야기가 되어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두려움만을 환기시킨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역사적 맥락은 지워지고 그 자리에 일종의 전락에 대한 공포가 놓인 채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엄마는 이모와 관계없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120쪽) 그러나 이러한 불안의식은 관계의 단절을 오히려 관계의 지속으로 변화시킨다. 엄마가 ‘나’에게 이야기해 준 순애 이모와의 시간들은 이모의 불행을 이모만의 불행이 되지 않도록 만든다. 시간의 흔적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시간의 간극을 통해 고통을 내면화하는 영속된 과정에서 성취된 공감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기 경멸과 분노라는 개별적 고통이 이야기되는 와중에 그 고통의 표면에 천착하지 않고 이해와 공감의 깊이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엄마와 이모의 서사는 “아무도 우리를 죽일 수 없어”(121쪽)라는 울림을 준다. ‘살얼음판’을 걷더라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국가와 역사의 폭력이 관계의 죽음을 불러오지는 못하리라는 믿음을 준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부정을 통한 현재의 위안이 아니다. 그것은 지속되는 과정 속에서 역사를 개별적 존재의 이야기로 수렴하는 행위이며, 문학적인 것이 개별적 삶의 곁에서 발화하는 공감의 윤리이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최은영의 「미카엘라」를 경유해야만 한다.
 
[일러스트=강일구]

[일러스트=강일구]

 3. 빛의 포착과 상상된 공동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해진과 최은영의 몇몇 단편들은 역사적 사건을 현재로 가져와 그 흔적이 이야기하는 바를 통해 관계의 회복을 넘어선 새로운 의미망을 생성하였다. '미카엘라'는 중층 구조로 조금 더 복잡한 얼개를 엮어 놓는다. '미카엘라'는 2014년 세월호 사건을 배면에 다루면서 한국을 찾은 교황의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 온 엄마와 그 딸 미카엘라의 이야기를 전경화한다. 엄마는 지방에서 미용실을 하며 생활을 꾸려가고 딸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 아빠는 노동운동에 투신했다가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죽고 없지만 엄마와 딸에게 미친 영향이 크다. 엄마는 교황의 미사에 참석한 후 딸의 집이 아닌 찜질방으로 간다. 그곳에서 엄마는 세월호 사건으로 손녀를 잃은 친구를 만나러 광화문에 가는 노인을 만나게 되며 그와 동행하게 된다. 딸은 그런 엄마를 기다리며 연락을 하나 연락이 닿지 않고 다음 날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엄마의 흔적을 찾아 광화문으로 간다. 여기에서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결합하는 한편, 엄마와 딸, 노인과 엄마, 미카엘라 들의 관계가 중층적으로 길항 작용 한다.  
 세월호 사건은 아버지의 노동운동과 결합하여 부조리한 사회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밝힌다. 이는 앞의 단편들처럼 특수한 역사적 국면이 아니라 여전히 지금-여기에 지속되는 정치적 퇴행이며 단독적인 불행이 아닌, 집합적이고 보편적 층위의 위기로 다가온다. 딸은 노동운동을 하던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본이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중산층 붕괴를 가속화하여,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아빠의 말은 딸에게 “이 집안을 빈곤 속으로 떨어뜨리는 주범”이 엄마를 일방적으로 ‘착취’하면서 내뱉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수의 선한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세상을 망친다”고 말하는 아빠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쉽게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승패가 뻔한 링 위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235쪽)기 때문이다. 딸에게 “세상이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수그리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고, 자신을 소외시키고 변형시켜서라도 맞춰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다.”(236쪽) 그러나 동시대의 사건은 존재를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키며 딸이 원했던 ‘세상의 초대’가 아닌 강제적으로 역사에 기입되도록 한다. 그것은 엄마가 찜질방에서 만난 노인의 친구가 겪게 되는 비극과 동일하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삶을 잃은 손녀의 세례명은 딸과 같은 ‘미카엘라’이며, 미카엘라가 광화문 광장에서 만난 여자 역시 세월호에서 딸을 잃는다.  
 
 여자는 노인을 부축하고 미카엘라의 엄마와 할머니를 찾아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리고 그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멀고 힘들지 않기를 바랐다. 다친 마음을 마음껏 짓밟고도 태연한 이 세상에서 그이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원했다.
 “엄마!”
 미카엘라가 여자를 불렀다. 여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음으로 딸애를 불러봤다.
 미카엘라.(241~2쪽)
 
 엄마는 노인을 따라 광화문에 가지만 미카엘라를 만나지 못한다. 미카엘라도 텔레비전에서 본 엄마를 찾아 광화문에 가지만 만나지 못한다. 어긋나는 시간의 병치로 인해 발생한 만남의 지연은 새로운 관계를 생성하는 미학적 구조로 답한다. 노인-엄마(여자)-미카엘라의 구조가 노인의 친구-(딸을 잃은)여자-손녀(미카엘라)의 구조와 결합하여 개별적 가족의 양태를 사회적 관계의 맥락으로 확장하여 사유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두 개의 삼각 구도의 결합은 서로 다른 미시적 역사 속의 개체적 존재로의 전락에 저항하고 보다 굳건한 연대의 미학적 구조를 완성하게 한다. 이는 사회적 부조리와 불합리한 폭력의 역사로부터 발생한 환멸을 보편적 존재로서 타자와 주체가 공동체적 공감의 가능성으로 돌파해 내려는 중요한 시도라 할 것이다. 그것은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241쪽) 시대의 어둠으로부터 존재들을 지켜주는 숭고로 작용한다.  
 이러한 시도는 조해진이 말하는 ‘세계에 대한 예의’란 측면에서 문학의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마는, 그래서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문주', 202쪽)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문학이 지향해야 하는 소명이 무엇인지 절박한 물음으로 마주하게 한다. 구체적 삶의 자리를 빼앗긴 채 부유해야 하는 존재들의 곁을 지켜내는 것('시간의 거절', '작은 사람들의 노래')이나 역사적 사건과 그로인해 포기되고 잊혀진 삶의 가능성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신짜오, 신짜오', 86쪽)라고 실감하고 공감하는 것은 삶과 문학의 관계와 그 소명에 대한 작가들의 철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와 욕망을 착취당하고 불안과 모멸을 내면화한 세계에서 타자를 돌아보지 않은 채 환멸을 토로하는 것은 참혹을 방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관계가 몰락해버린 주체는 90년대 이후, 내면의 서사를 통해 비루한 일상에 매몰되거나 환상 속으로 침잠했다. 문학은 주어진 현재를 수용하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임슨(F. Jameson)의 말처럼, 사회 체제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사회 체제를 상상해야 하는 것이다. '미카엘라'가 보여주듯 공동체적 공감으로의 문학은 부조리한 국가 권력의 폭력적 체제 너머의 새로운 체제를 상상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촛불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사소함으로 비롯된다. 조해진의 '빛의 호위'는 ‘어쩔 수 없이’ 권은의 집을 찾아간 ‘나’로부터 하나의 촛불이 불을 밝히게 된다. 시사 잡지사 기자인 화자는 분쟁지역 전문 사진작가인 권은을 인터뷰하지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화자는 어릴 때 같은 반이었던 권은을 찾아갔던 기억을 한 조각씩 찾아내며 서서히 그녀와의 관계를 떠올린다. 그 과정에서 화자는 권은이 말한 헤겔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 속,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알마 마이어와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부터 알마를 숨겨준 호르니스트 장, 팔레스타인 구화 과정에서 피격당해 죽은 노먼 마이어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단편은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알마와 장 그리고 노먼에게 미친 영향보다는 그 과정에서 사람을 살게 하는 힘, 다시 말해 ‘사람을 살리는 일’의 선의를 ‘나’와 권은의 이야기 속에 나란히 배치하면서 ‘사회 체제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사회 체제를 상상’하게 한다.  
 헬게 한센은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게 된 계기에 대해 “역사의 폭력에 맞서는 개인의 가치있는 용기”를 알마 마이어를 통해 보았으며 “생존자는 희생자를 기억해야 한다”(16쪽)고 말한다. 이 발화는 당위적이어서 오히려 알마 마이어의 말, 이를테면 “사람이 노먼을 시대의 양심이니 유대인의 마지막 희망이니 하는 수식어로 포장하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21쪽)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거창한 수식어 뒤에 숨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정의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이른바 “천진한 기만” 같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알마는 “무기력한 환멸”만을 목도할 뿐이지만, 시대와 연결된 윤리적인 책무로써 증언자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는 기억하는 행위가 지닌 관계의 재구축과 관련되어 “살아 있는 한 그 모든 아픔은 위로받고 치유되기 위”(22쪽)한 연대의 지난한 과정에 해당한다. ‘나’가 권은과의 일을 단숨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떠올리는 것 역시 이러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며 권은의 작업과도 연결된다.  
 권은은 사진작가이다. 그것도 분쟁지역에서 보도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분쟁지역에서의 권은의 사진에는 ‘절박한 열정’이 투사되어 있다. 이때의 ‘절박한 열정’이 무엇인지는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와 교직되는 서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권은의 결핍과 상처에 있다. 유독 조해진의 소설에는 디아스포라적인, 유배되어 떠돌아다니는 존재들이 배치된다. ‘로기완’이 그랬듯이, 이번 소설에도 한 곳에 정주하여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보이지 않는다. 부유하는 그들은 권은처럼 사진작가로, 해외입양('문주'), 삶의 고단함으로 인해('번역의 시작', '산책자의 행복', '시간의 거절'), 새로운 삶의 가능성 때문에('잘 가, 언니') 이곳이 아닌, 저 너머를 향하거나 자신의 기원을 찾는 방황을 한다. 권은의 행위는 셔터를 누르는 찰나의 빛으로 결핍과 상처라는 단절된 단독성의 세계를 현실의 시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공동체적 지평 위로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행하게 만든다.  
 
 테두리가 흐릿해지고 있는 발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권은이 말했다. 발자국 안에 빛이 들어 있어. 빛을 가득 실은 작은 조각배 같지 않아? 어, 그런가… 여기에도 숨어 있었다니… 뭐가? 셔터를 누를 때 카메라 안에서 휙 지나가는 빛이 있거든. 그런 게 있어? 어디서 온 빛인데? (…)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권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32쪽)
 
 찰나의 순간, 이 세계 너머를 엿볼 수 있는 빛의 마법은 결핍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순간이 된다. 그 순간은 고유한 시간을 지닌 여러 배열체들의 사건으로, 존재와 존재 사이의 사건으로 개입해 들어옴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빛의 호위’라는 공명의 결과를 낳는다. 결핍과 상처를 제거하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보존하는 동시에 ‘조각배’처럼 이야기를 태우고 존재와 존재 사이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이 공감의 최대치를 끌어내게 되고 부유하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의 지향 역시 바로 그러하다.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일,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빛으로 공명하는 일이야말로 문학이 상상하는 일이 아닐까.
 
 
 4. 작은 불빛 하나에서 비롯된 단 한 사람
 
 부유하는 존재 혹은 디아스포라적인 존재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작은 빛으로도 가능하다. 그것은 저 광장을 밝히는 하나하나의 촛불이 되기도 하면서 발자국 안을 채우는 빛이기도 하고 정전의 밤에 한 끼의 식사를 위한 조그만 공동체를 밝히는 ‘빛의 호위’이기도 하다. ‘문주’라는 이름은 “지붕을 떠받쳐주는 뿌리이자 건축물의 무게중심이 되는 문기둥”(201쪽)의 내포적 의미를 지니면서, 한국 동북지역의 사투리로 ‘먼지’를 가리키기도 하다. “철로를 따라 걷던 위태로운 여자아이”(199쪽)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문기둥’보다는 부유하는 존재인 ‘먼지’가 ‘문주’의 정체성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과 국적과 주소가 모두 다른 나라로 기록되는 떠돌이”라는 자기인식이 뒤따르는 것 역시 동일한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해외입양자인 문주는 자신의 이름을 추적해가는 서영의 영화에 흥미를 느껴 한국으로 온다. 자신의 기원을 찾는 여행은 존재로 하여금 불안정의 일상화가 비정상적인 상태로 지속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입양한 앙리가 영화에 매혹된 이유와 유사하다. 그것은 “미정(未定)의 삶”(205쪽)에 대한 호기심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앙리는 끊임없이 스크린의 바깥을 상상했다. 스크린과 평행을 이루며 존재하지만 증명되지는 않는 곳, 카메라의 욕망이 은닉된 공간이자 영원히 미완으로 남는 무한의 영토(205쪽)
 
 스크린을 채우는 빛이 아닌 스크린 너머에 존재하는 ‘단절’로서의 삶에의 매혹. 그러나 저 ‘무한의 영토’는 ‘깜깜’하다. 아직 정해지지 아니한 삶이란 깜깜하기만 한 걸까.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단절되었으나 여전히 어딘가에서 지속될 삶이라는 측면에서 ‘미정의 삶’이란 익숙한 체제에 안정적으로 정박되어 있는 것이 아닌 무정형의 가능성으로 부유하는 삶일 것이다. 문기둥이 아닌 먼지로써의 삶. 저 스크린으로 강제된 시공간에 태연하게 안착하여 유지되는 삶이란 바우만(Z. Bauman)식으로 말하자면, 유동하는 근대의 잉여적 존재를 강요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스크린 너머, 단절로 지속되는 삶이야말로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의 삶일 것이다.  
 기관사가 문주를 다시 찾으려고 했는지, 복희식당 노파가 문주의 가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원을 찾는 과정은 깜깜하기만 한 ‘무한의 영토’를 넓히는 일이며, 그 과정을 통해 생성된 관계로 새로운 삶을 타진하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정전의 밤, 유리문에 어른거리는 빛을 따라 식당 안으로 문주는 들어간다. “커다란 그림자의 보호를 받으며 일렁이는 촛불 앞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208쪽)으로. 그 마음은 노파의 이야기를 듣게 만들고 그녀의 죽음을 지키게 한다.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상상은 개별적 존재의 사건들이 각자의 사연을 지닌 채 부딪치고 결합하면서 확장된다.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산책자의 행복', 127쪽)다는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깜깜한 무한 속으로 잠식될 위험은 어디에나 상존해 있다. 부재에 대한 두려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세계에로의 전언이 그 무엇에도 닿지 못해 실패하게 되리라는 공포는 존재로 하여금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142쪽)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거울 안의 ‘나나’를 그대로 둔 채, ‘문주’ 혼자 거울 밖으로 밀려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빛은 그림자를, 그림자는 빛을 호위하며 서로 분리되지 않을 공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빛이 될 수는 없다. 다만 그 빛의 그림자를 따라 단 한 사람의 결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을 담당할 뿐이다. 좌절과 실패로 침잠하는 세계와 투쟁하며, 자신의 존재를 말하지 못하는 이들 곁에서, 진실의 재현을 욕망하는 이들의 편이 되어줄 ‘단 한 명’의 동조자로서 문학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폭력과 사회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단 한 명. 내 편을 들어줄 단 한 사람. 때리지 말라고 말해줄 사람”(249쪽)으로 남는 일은 어째서 어려운 것일까. 최은영의 신작 '그 여름'은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단 한 사람’의 존재로 『쇼코의 미소』의 미덕이었던 공동체적 공감의 윤리를 이어간다. 쇼코와 소유의 정서적 공감의 과정('쇼코의 미소')이나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부딪치는 소은과 미진의 정신적 연대('먼 곳에서 온 노래')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최은영은 한 발 더 나아가 이경과 수이의 관계를 통해 ‘단 한 사람’의 윤리를 성찰한다.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난 그들을 명명하는 사회적 용어는 ‘성소수자’이다.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라는 차별과 억압의 사회적 관계를 표면에 내세우지만, 배면에 깔려 있는 것은 그들과 사회적 관계의 문제이다. 또한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들은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답을 골라내야만 하는 수이로 상징된다. 체제 내로 안착하기 위해 체제가 요구하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수이. 그러나 이경에 대한 수이의 사랑은 강요당한 선택이 아닌 오롯한 자신의 욕망이다. 살스비(J. Sarsby)는 어떠한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는 공적이며 동시에 사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보았다. 사람을 사랑하고 선택하게 되는 행위는 사적 공감의 영역이면서도 동시에 공적인 차원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며, 사회적 요구에 부합하려는 욕망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사랑은 이성애적 사랑이다. 이경과 수이의 관계, 혹은 이경과 은지와의 관계를 포함한 동성애 커뮤니티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의 사랑은 사회적 요구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보존하려는 것이며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는 투쟁이 된다. 사적인 세계와 공적인 세계와의 충돌로 억압당하는 존재의 곁에서 작가는 그들 역시 똑같은 감정의 교류를 하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수이는 이경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구나. 모든 표정을 거두고 이렇게 가만히 쳐다볼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경은 자신 또한 그런 식으로 수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219쪽)
 
  어떠한 편견 없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은 그 사람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서로가 서로의 차이에 눈을 맞추고 바라봄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생성한다. 이 또한 사소한 일이면서도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그 곁을 지켜내고 그 작은 행동이 서로에게 이어지는 것은 작지만 숭고한 일이다. 작가는 이경의 목소리에서 출발하여 수이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러면서 강요된 침묵의 곁을 지켜주고자 한다. 하지만 수이와 이경의 계급적 차이와 시간의 층위는 둘의 결별을 불러온다. 사랑하는 관계가 그렇듯 오래된 만남은 새로운 시작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단순한 연애 서사처럼 재현되는 만남과 결별의 구조는 ‘한 사람’의 곁이 쉽사리 관계의 결로 소급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사회적 편견을 온몸으로 감내해야하는 약자들에게 자신의 편이 되어줄 ‘한 사람’은 더욱 드물기만 하다.  
 
 수이는 늘 미래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왔었다. 마치 자기는 과거나 현재와 무관한 사람이라는 듯이 성인이 되면, 대학에 가면 벌어질 미래의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수이는 사 년 뒤의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그것도 한 치의 의심 없이 기다려온 미래에 배반당한 적 있는 수이가.(231쪽)
 
 확고한 신념을 갖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미래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의 상황이 그만큼 절망적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현실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섣부른 희망이나마 지니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런 상황 속에 놓인 수이에게 이경과의 완전한 결합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있다. 수이를 떠올리며 서사를 길어 올리는 이경의 현재는 그런 수이의 미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를 말하던 수이는 이경의 현재에서는 항상 부재중이다. 수이가 “한 치의 의심 없이 기다려온 미래”를 이경은 현재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수이는 실패한 것인가. 수이는 절망적이고 절박한 환멸의 시대 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인가. 최은영은 ‘열여덟의 그 여름’을 기억하는 이경을 통해 수이를 현재로 불러왔다. 단절로 지속되는 삶이라는 역설로 “수이는 시간과 무관한 곳에, 이경의 마음 가장 낮은 지대에 꼿꼿이 서서 이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266쪽)는다. ‘영원히 미완으로 남는 무한의 영토’에서 살아가게 될 수이를 기억하고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이경과 수이의 작은 공동체를 굳건하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 될 것이다.  
 문학이 상상한 저 너머의 세계는 작은 불빛 하나에서 혹은 서로를 바라보는 사소한 눈빛에서 비롯된다. 문학이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의 정치적 힘을 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통해 과거의 시간 속에서 부유하는 존재를 ‘단 한 사람’의 기억이라는 빛으로 호위하며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한다. 잊지 않는 것,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고립된 저 ‘유실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는 어쩌면 서글픈 전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전언에 응답해야만 하는 이유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환멸로 남겨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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