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성의 하만 인수, 아람코 IPO 자문 등 맹활약

중앙선데이 2017.09.24 02:35 550호 25면 지면보기
[투자은행의 세계] 부티크 IB
지난해 11월 21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박종환 부사장(오른쪽)과 손영권 전략혁신센터 사장(왼쪽)이 전장업체 하만의 디네쉬 팔리월 최고경영자(CEO)와 협력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지난해 11월 21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박종환 부사장(오른쪽)과 손영권 전략혁신센터 사장(왼쪽)이 전장업체 하만의 디네쉬 팔리월 최고경영자(CEO)와 협력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초거대 석유 기업 아람코가 2018년 기업공개(IPO)를 앞두고 있다. 예상대로 2조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다면 전체 지분의 5%만 상장하는 이번 IPO만으로도 규모가 무려 1000억 달러에 달한다. 사상 최대 IPO 타이틀을 일찌감치 예약해 둔 셈이다. 규모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경제 개혁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이벤트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매우 큰 거래다. 당연히 월가의 내로라하는 투자은행들은 이 IPO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그려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그 첫 단계는 IPO 자문사(Advisory)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합이다. IPO 전 과정의 세부 전략을 수립해 아람코를 자문하는 자리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람코가 낙점한 자문사 리스트를 들여다보면 그 절반이 생소한 이름들이다.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거대 IPO를 ‘모엘리스앤코(Moelis & Co.)’, ‘엠클라인앤코(M. Klein & Co.)’, ‘에버코어파트너스(Evercore Partners)’와 같은 투자은행들이 진두지휘하게 됐다. 이른바 ‘부티크(Boutique) 투자은행(IB)’들이 대형 투자은행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것이다.

버핏이 아끼는 트롯 BDT 회장
트럼프의 뱅커 역할 모엘리스 등
고객 신뢰와 전문성으로 틈새 공략
금융위기 후 대형 IB 제치고 급부상

 
그중 에버코어는 삼성과도 인연이 깊다. 비록 무산됐지만 2014년 삼성이 ‘월가의 스마트폰’으로 불리던 블랙베리 제조사 ‘림(RIM)’에 눈독을 들일 때, 물밑 작업을 벌인 게 에버코어였다. 지난해에는 마침내 유수의 글로벌 투자은행들을 따돌리고 삼성의 ‘하만(Harman)’ 인수를 자문해 업계에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정통 IB 업무 장악
금융위기 이후 부티크 IB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대형 투자은행들이 신뢰가 추락하고 온갖 규제에 시달리는 사이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아람코 IPO처럼 자문사를 선정할 때, 부티크 IB를 포함시키는 것이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 잡은 덕도 크다. 대형 투자은행은 쓸모가 커 자문사에 포함시키지만, 이리저리 이해관계가 복잡해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탓에 부티크 IB에게 감시자 역할을 맡기는 형국이다.
 
부티크 IB는 전통 IB(자본 조달, 인수합병 , 구조조정) 영역에 집중해 수수료 수익을 올리는 소규모 투자은행이다.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제이피모건 같은 대형 투자은행들은 IB는 물론 트레이딩, 자산 관리 등 투자은행업 전 영역에 걸쳐 종합 서비스를 제공해 ‘벌지 브래킷(Bulge Bracket)’이라 불리는 데 반해, 부티크 IB는 ‘딜 메이커’ 역할에 집중한다. IB 기본에 충실해, 위험 감수는 최소화하고 고객이 원하는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 최대 과제다. 감수하는 위험의 규모가 작다 보니 필요한 자본금도 적어 대다수의 부티크 IB는 파트너십 형태를 띤다. 소수의 파트너가 출자해 IB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수료를 자신들이 다시 나눠 갖는 구조다. 이는 월가 대형 투자은행들의 최초 사업 모델이기도 하다. IB 사업을 하는 파트너십 금융사로 출발한 대형 투자은행들은 1980년대부터 트레이딩을 키우는 등 사업다각화에 나서면서 IPO를 통해 자본금을 확충하고 덩치를 키워 오늘에 이르렀다.
 
부티크 IB는 고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선택과 집중이 핵심 전략이다. 대형 투자은행의 자본력, 글로벌 네트워크, 광범위한 서비스 영역에 맞서려면 경쟁력 있는 틈새시장을 찾아내 집중 공략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람코 IPO의 자문을 주도하는 켄 모엘리스 모엘리스앤코 회장은 오래전부터 중동 지역에 많은 공을 들였다. 다수의 중동 국영 기업과 거래를 하면서 까다로운 왕족들과 친밀해지고 복잡한 이슬람 금융에 대한 전문성을 쌓은 게 지금의 결과를 낳았다.
 
부티크 IB가 내세우는 비장의 무기는 끈끈한 고객 관계다. 부티크 IB의 창업자나 파트너가 특정 산업, 지역 등에 대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소수의 고객에게 밀착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것저것 챙길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대형 투자은행의 최고경영자(CEO)는 결코 경쟁할 수 없는 서비스다.
 
부티크 IB와 고객의 관계는 단순한 사업 관계를 초월한다. 오랜 기간 쌓아 올린 높은 신뢰 덕분에 고객 내부 사정에 정통한 금융 해결사 역할을 맡기도 한다. 대형 투자은행 출신이 대부분인 부티크 IB의 파트너들은 이전 직장에서 맺은 고객과의 인연을 밑천으로 창업한 후에도 그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새로운 거래로 연결 짓는다. 더 나아가 유명 인사를 상대로 기업 인수, 매각 등에 대해 자문하는 관계가 오랫동안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구누구의 IB 뱅커라는 비공식 직함을 얻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워런 버핏 회장이 가장 아끼는 금융가인 바이런트롯 BDT 회장. [중앙포토]

워런 버핏 회장이 가장 아끼는 금융가인 바이런트롯 BDT 회장. [중앙포토]

바이런 트롯 BDT캐피털파트너스 회장은 워런 버핏 버크셔헤서웨이 회장이 가장 아끼는 뱅커로 알려져 있다. 2002년부터 골드만삭스에서 버핏의 전담 뱅커로 일한 인연이 계기가 됐다. 버핏이 “월가의 어느 누구보다 버크셔헤서웨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IB 뱅커”라고 극찬한 트롯은 ‘고객이 항상 최우선’이라는 골드만삭스의 사업 제 1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회사 안팎에서 유명했다. 자신의 부하 직원들이 사내 엘리베이터에서 고객의 사적 정보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는 이유로 해고시킬 정도로 고객 관리에 철두철미했다. 2008년에는 버핏의 50억 달러 투자를 이끌어 내 금융위기의 나락으로부터 골드만삭스를 구해내기도 했다. 일찍이 버핏의 인정을 받아 그의 이너서클에 들어간 트롯이 버핏의 재무 상태 및 투자 성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만족스런 투자 조건을 정확히 제시한 게 주효했다. 트롯은 2009년 골드만삭스를 떠나 BDT를 창업한 후에도 버핏은 물론 그가 틈새시장으로 삼았던 부유한 가족 기업에게 근거리 자문을 계속 하고 있다.
 
억만장자 모이는 선밸리 컨퍼런스 주최도
최근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선 스티브 배넌 전 미국 백악관 수석전략가도 유사한 길을 걸었다. 골드만삭스 IB 뱅커 출신인 그는 1990년 회사를 나와 부티크 IB ‘배넌앤코(Bannon & Co.)’를 세워 아랍 최대 부호 알왈리드 왕자의 뱅커로 한동안 활약했다. 그밖에 UBS 투자은행 CEO를 지낸 모엘리스 회장은 1990년대 초 트럼프의 카지노 사업 구조조정을 자문한 인연으로 트럼프의 뱅커가 되었고 지난 대선에서는 그를 지지하기도 했다.
 
부유한 기업 오너들은 서로 만나서 교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을 간파한 부티크 IB들은 그들에게 교류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고객 네트워크를 관리한다. 대표적 부티크 IB는 미디어, 정보통신(ICT) 산업에 특화된 ‘앨런앤코(Allen & Co.)’다. 워런 버핏, 빌 게이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거물급 인사들이 매년 7월이면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간다는 ‘선밸리 컨퍼런스’를 주최하고 있다. 천혜의 리조트에서 가족 동반으로 일주일을 함께 보내는 행사라 사적으로도 서로 친밀해져 그들만의 파워 인맥은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억만장자들의 여름 캠프’로 불리는 이곳에서 긴장을 풀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다 보니 기업 인수합병 논의가 급물살을 탄 사례도 많았다. 2013년 선 밸리 컨퍼런스에서 마무리 된 제프 베조스 아마존 회장의 워싱턴포스트 인수가 대표적이다. 도널드 그레이엄 당시 워싱턴포스트 회장이 부른 첫 매각 희망 가격을 베조스 회장이 추가 협상 요구 없이 바로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거래의 자문은 당연히 알렌앤코가 맡았다.
 
월가 투자은행업계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부티크 IB는 결국 업의 본질에 충실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자본 중개라는 투자은행업의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서비스업의 기본인 고객 만족을 철칙으로 삼아 금융위기의 파고를 넘었다. 그 결과 이제는 글로벌 IB시장에서 대형 투자은행과 대등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반면 업의 본질을 무시하고 위험 감수를 IB보다 우선시하며 단기적 이익에 매달렸던 많은 대형 투자은행들은 이해상충의 덫에 걸려 고객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은 고객뿐만 아니라 인재도 잃었다. 회사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IB 인재들이 자신들이 가진 고객 관계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부티크 IB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금융 환경의 변화는 늦게나마 대형 투자은행들이 자신들의 사업 모델을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기본으로의 회귀다. 위험 감수는 금기어가 된 지 오래고, 고객이란 단어는 매 순간 입에 달고 산다. 자연히 고객 접점의 최전선에 있는 IB 사업부의 위상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 모든 변화에 부티크 IB가 중요한 자극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부를 이 대전환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최정혁 전 골드만삭스은행 서울 대표
경영학박사. 씨티은행, 크레디트 스위스, UBS에서 FICC(Fixed Income, Currencies and Commodities, 채권·외환·상품) 트레이더로 일했다. 현재 대학에서 국제금융과 금융리스크를 강의하며 금융서비스산업의 국제화를 연구하고 있다. jungchoy@gmail.com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