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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개막식, 서울 올림픽 ‘굴렁쇠’에서 배웠죠”

중앙선데이 2017.09.24 02:00 550호 8면 지면보기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Dimitris Papaioannou) ⓒJulian Mommert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Dimitris Papaioannou) ⓒJulian Mommert

‘카펫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을 상징하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민요를 부르는 노인이 날면, 달 표면을 눌러 놓은 듯한 원형 그라운드를 홀로 가로지르는 여인의 발걸음을 따라 생명의 풀이 돋는다. 여인이 호수에 다다르면 대지를 뜯고 나온 수십 명의 남자들이 탭댄스같은 민속춤을 추고, 그 진동으로 지면이 갈라지면 한 남자가 땅에서 솟은 불덩이로 바닥에 불을 붙인다. 불길은 순식간에 퍼져 그라운드에 거대한 헤라클레스의 형상을 새기고, 이 불길을 거둔 두 남녀가 불씨를 정면의 커다란 원반에 던지면 점화된 성화가 마치 개기일식 태양처럼 떠오르며 원형 경기장 주변의 호수를 장대하게 수놓는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SPAF 오는 ‘위대한 조련사’ 연출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2015년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 1회 유러피안 게임 개막식 ‘오리진(Origin)’ 영상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민족과 지구를 한순간에 아울러 이토록 장엄한 스펙터클을 총연출한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53)가 한국에 온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공동 제작에 참여한 최신작 ‘위대한 조련사(The Great Tamer·9월 28~30일, 아르코예술극장)’와 함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기도 했던 이 그리스의 ‘위대한 예술가’의 최신작은 올해 아비뇽 축제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순수 미술을 공연 예술로 자유롭게 재해석한 듯한 그의 ‘피지컬 씨어터(physical theater)’는 알쏭달쏭하지만 예상치 못한 놀라움의 연속이자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다. 이 무대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중앙SUNDAY S매거진이 그를 전화로 먼저 만나 몇 가지 키워드로 그의 예술 세계를 정리해 봤다.

‘위대한 조련사’ 중에서 ⓒJulian Mommert

‘위대한 조련사’ 중에서 ⓒJulian Mommert

사실 말로 설명하긴 쉽지 않다. 인체를 분절시키거나 기형적 형상을 만드는 서커스적인 움직임 같이 꿈에서나 볼 법한 이상한 이미지가 부조리극처럼 이어진다. ‘인간의 삶이란 발견의 여정이자 숨겨진 보물을 탐사하고 의미를 파헤치는 일’이란 주제라는데, 올림픽 개막식 같은 스펙터클은 커녕 착시를 유발하는 영상 테크놀로지도, 비싸고 복잡한 무대 세트도 없다. 인간의 역사와 예술,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오직 인간의 몸으로 펼쳐 놓는 100% 아날로그의 ‘험블한’ 무대다.

 
이른 아침 시간 담배 한 대 맛있게 태우며 화상 전화 앞에 앉은 디미트리스는 “많은 작품에 직접 출연하지만 이번에는 못 나선다”며 아쉬워했다. “10명이나 출연하는 섬세하고 복잡한 작품이라서요. 보통 무대를 오가며 연출할 여유가 있는데 불행히도 이번엔 안되더군요. 나도 나가고 싶었지만 몇몇 장면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무대밖에 있어야 완성도가 좋다는 걸 깨달았죠.”
 
하지만 ‘위대한 조련사’와의 만남은 여전히 설레는 일이다. 대규모 행사를 치르고 나면 “표현이 좀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라는 그는 2015 유러피안 게임 이후 첫 작품인 이 무대에 자신의 철학과 예술관을 몽땅 털어 넣어 집대성했다. “죽기 전에는 완전히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고 싶거든요. 언젠가 내가 표현하고 싶은 모든 걸 다 할 수 있기 위해 지금도 성장 중이고, ‘위대한…’도 그 과정인 거죠.”  
 
화가의 눈으로 만드는 공연
연출가이자 안무가, 배우, 무대와 조명·의상디자이너까지 겸하고 있는 전방위 공연예술가 디미트리스는 사실 순수 미술을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터와 만화가로 먼저 명성을 얻었다. 우연히 무용에 빠져 미국에 건너가 일본의 부토(舞踏)와 에릭 호킨스 안무 테크닉을 배웠고, 독일에서 로버트 윌슨과 피나 바우쉬를 만난 감동으로 공연계에 정착하게 됐다. 그는 이 두 사람이 자신의 예술을 극과 극에서 지탱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로버트와 피나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거장들이죠. 성향이 정반대지만 둘 다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줬어요. 나는 로버트의 차가움과 초현실주의, 비주얼 파워와 피나가 가진 휴머니티의 거대한 힘을 사랑하죠. 피나의 공연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좀 더 인간다워진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인간을 더 이해하고 관용하고 사랑할 준비가 돼서 나오는 거죠. 그들의 영향은 내 마음의 밑바닥에 지금도 머물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창작 영역을 회화에서 신체 쪽으로 옮기면서 스스로를 더 잘 표현하게 됐지만 여전히 시각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화가의 눈’을 사용해 쇼를 창조한다”고 했다. 아테네 개막식에서 고대 회화 속 이미지들이 살아 움직이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위대한…’에서 렘브란트의 ‘해부학 수업’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해 라파엘·엘 그레코 등 서양미술사를 잔뜩 오마주한 이유다. “나는 말하지 않고 오직 몸을 움직여 이미지를 창조하니까요. 말이 있는 연극을 한다면 말로 표현하겠지만 이미지와 에너지, 움직임 만으로 연극을 만들기에 비주얼 레퍼런스가 필요해요. 말없이 이야기를 하려면 누구에게나 통하는 이미지가 필요하고, 그래서 미술사를 참조합니다. 미술사는 인류 공통의 역사이며, 모두가 알아보는 것이니까요.”
 
‘위대한 조련사’ 중에서 ⓒJulian Mommert

‘위대한 조련사’ 중에서 ⓒJulian Mommert

몸으로 구현하는 초현실주의
‘위대한…’에는 미술사의 명화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사용하고 사무엘 베케트 부조리극의 느낌도 있다. “초현실적인 무대를 위해 왜곡되고 슬로우다운된 슈트라우스 왈츠의 느낌과 베케트의 기괴하고 이상한 분위기가 필요했다”는 그는 “내가 이야기를 가장 잘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언가를 꿈처럼 창조하는 것이기에 초현실주의를 사랑한다”고 했다.
 
“초현실주의도 대중에게 꿈의 잠재의식을 보여주니까요. 초현실주의로부터 마치 꿈속에서 만나듯 불가능하고 이상한 분위기와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 매력적이라는 걸 배웠어요. 나는 달리나 마그리트의 그림과 데이빗 린치의 영화도 좋아해요. 이상한 분위기가 눈앞에 나타나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감정을 이야기해주니까요. 언어가 아닌 이미지만 이런 감정을 전할 수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정확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도 뭔가를 느끼게 되죠. 마치 꿈속에서 ‘크레이지 이미지’를 보는 것처럼.”
  
정신성+에로티시즘=그리스적 아이덴티티
‘위대한…’에서 그런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은 곧잘 분절된 인체를 활용한 움직임을 통해 구현된다.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의 하이라이트가 호수에서 떠오른 거대한 가면 모양 조각상이 쪼개지며 중심의 토루소를 드러낸 순간이었던 것처럼,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그리스적 아이덴티티’다. 그는 “내 ‘그리스적 아이덴티티’는 고대 그리스 미술의 시그니처인 대리석과 누드, 분절된 인체상으로 인해 형성됐다”면서 “그리스적 아이덴티티의 본질은 정신성과 섹슈얼리티의 공존”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는 정신성과 섹슈얼리티를 드러냄으로써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 했죠. 그것들은 그리스 예술에 늘 공존하고 있고, 나는 그걸 아주 좋아해 항상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내 이미지들도 철학과 에로티시즘 양쪽에 집중하고 있어요.”
 
그가 늘 추구하는 동성애적 분위기도 ‘그리스적 아이덴티티’의 일종인데, 그는 “호모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호모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에 가면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 느껴지는 바로 그 느낌이 에로티시즘이에요. 나는 내 고유한 관점으로 내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나는 그리스 남자고 게이죠. 그래서 나는 세상을 그런 시점에서 보고, 내 표현에 한계를 두지 않고 더 크게 확장시키려 노력합니다. 여성 아티스트가 페미닌한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미국 아티스트가 미국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듯, 나는 내 관점에 충실하고 내 이미지들을 세상에 제안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컨템포러리 그릭 아티스트’임을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에만 갇혀 있지 않고 인간과 예술의 역사 전체를 다룬다는 것이다. “나는 미술을 사랑하고 미술에서 배웠어요. 그래서 초현실주의·표현주의 등 내가 좋아하는 미술사의 모든 것을 작업에 활용하죠. 그런데 모든 선배 아티스트들은 휴머니티에 기여했고, 나 역시 그런 휴머니티의 일부로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어요. 내가 전통을 현대적인 맥락으로 잘 살리고 있다면 그저 역사와 미술사의 요소들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일 거에요. 나는 결코 뭔가를 표현해야겠다고 고른 적이 없어요. 정말 사랑하기에 그것들이 내게 다가오고, 자연스럽게 발산될 뿐이죠.”
 
‘위대한 조련사’ 중에서 ⓒJulian Mommert

‘위대한 조련사’ 중에서 ⓒJulian Mommert

無에서 詩를 창조하는 무대
그가 그리스의 전통이나 선배 예술가들만 오마주하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는 ‘프라이멀 매터’(2012) ‘스틸 라이프’(2014) 등 자신의 최근작까지 참조하고 있는데, 이 최근작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가 탄생한다(poetry can be created out of nothing at all)’는 믿음으로 아주 작은 디테일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 천착하는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가난한 미술)’ 운동을 대표하는 그리스의 설치미술가 야니스 쿠넬리스, 그리고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화가 야니스 차루치스의 영향이기도 하다.
 
“내 그림 선생님은 아주 위대한 예술가였어요. 일상에서 아주 소박한 재료로 시적인 그림을 창조했으니까요. 아르테 포베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시가 어디에나 있다는 걸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일상의 소재에서 시를 발견하는 것은 관찰자의 눈’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런 제스처를 좋아해요. 우리가 인생의 요소들을 어떤 식으로 연결짓느냐에 따라 세상을 좀 다르게 볼 수 있고, 그게 바로 시가 되는 과정이거든요. 한 시인은 ‘작은 시인은 뉴스와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고, 보통 시인은 시대에 관해 글을 쓰지만, 큰 시인은 우주로 폭발하는 사소한 디테일에 집중한다’고 했죠. 모든 것에서 시가 탄생할 수 있다는 얘긴데, 내 작품에서도 그걸 보여주고 싶어요.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소박한 디테일로부터 탄생하는 시적인 순간에 점점 큰 의미를 두게 되는 거죠.”  
  
올림픽 개막식은 ‘에스닉하게’
평창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우리가 그에게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2004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이라는 이력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닌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이자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을 열었던 그리스 아테네에서 100여 년 만에 열린 올림픽이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연출한 올림픽 개막식이 “그리스에 대한 알레고리”였고, “그리스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면서도 전세계에 말을 걸 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평창 올림픽을 준비 중인 우리에게 해줄 말이 없냐고 묻자 예상 외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아테네 올림픽이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고백이었다. “당시에 과거의 개막식들을 스터디하면서 서울 올림픽도 참고했었는데, 몇 가지 요소가 아주 좋았어요. 어린 소년이 혼자서 굴렁쇠를 굴리며 전체 그라운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가로지르던 순간이 너무도 특별한 감명을 주더군요. 그래서 아테네 올림픽에 어린 소년이 종이배 모양 보트를 타고 홀로 물을 가르는 순간을 비슷하게 연출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올림픽 세리머니는 세계에 그 도시의 순수한 요소와 고유한 전통문화를 보여줄 매우 유니크한 기회”라며 “당신들의 에스닉이 강력하고 경쟁력 있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림픽 세리머니는 아주 큰 쇼이기에 보통 서구의 쇼비지니스식으로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자기들의 문화를 서구화된 팝컬쳐로 승화시키려는 몸부림이랄까요. 나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한 문화가 어떻게 ‘캐릭터라이즈화’되느냐죠. 굳이 내가 조언을 준다면 유럽과 미국의 팝컬쳐를 흉내 내려 하지 말고 전통에 자신감과 애정을 가지라는 거예요. 저들이 대규모 행사에서 이룩한 방법론만 배워서 로컬 문화를 보여주길 바랍니다. 세계가 평창의 문화를 알게 될 다시 없을 기회잖아요.”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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