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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지식 포기 불가능한 시대
줄기세포·미세먼지·알파고…
이런 문제들에 무지하다면
남의 손 안에서 흔들릴 것
뭐니뭐니 해도 완벽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었을 이야기는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시한 우주에 대한 설명이 아닐까? 지구에서 달까지를 지상계, 달보다 높은 곳을 천상계로 나누고 천상계에서는 완전한 원운동만 일어난다고 믿었다. 지상계에서 본질적으로 무거운 것들은 우주의 중심인 지구의 중심으로, 본질적으로 가벼운 것들은 달의 공전 면을 향해 움직인다. 아뿔사, 찌그러진 데 없는 원운동만 해야 하는 하늘에 있는 달이나 행성들이 타원 운동을 하거나 거꾸로 움직이기도 한다. 천상계에서는 완벽한 원운동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원 위에 작은 원을 그렸다. 큰 원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원을 따라 행성이 움직인다면 타원이나 역행을 설명할 수 있다. 현상을 구제하는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시대의 자원을 동원해서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그 시점의 과학이다.
큰 원 위에 그린 작은 원을 주전원, 에피사이클(epicycle)이라고 부른다. 플로지스톤, 에테르 그리고 에피사이클. 최선을 다해 현상을 구제하는 설명을 해도 그것은 오류를 품고 있을 수 있고 언젠가는 다른 설명에 자리를 내어 주기도 한다. 이런 사실들은 이젠 잘 알려져 있다.
30년 전 브루노 라투르가 스티브 울가와 함께 실험실에서 테크니션으로 일을 하면서 과학자들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를 만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원주민을 관찰하는 지식인의 시선이라는 비판이 인류학적인 보고에 주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 경우엔 관찰자가 아래에 서서 위에 있는 과학자들을 보았던 것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객관적이고 안정적인 지식이라고 믿었던 과학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인류학적 시선으로 보니 그것이 다른 종류의 지식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원리적으로는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졌지만 아직까지도 외부인이 과학 지식이나 그것이 만들어지는 현장에 접근하는 것은 어렵다.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이 절반이 넘는데, 보통 사람이 수학과 전문 용어로 무장한 과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겠는가? 하지만 현대인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과학 지식을 포기하기는 불가능해졌다. 과학과 기술은 너무나 철저하게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줄기세포, 가습기 살균제, 농약 계란, 미세 먼지, 기상 이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알파고와 인공지능(AI). 이런 문제들에 무지하다면 우리의 삶은 남의 손 안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과학 기술을 삶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을 역사 위에, 사회 위에, 사람의 삶 위에 놓고 맥락과 전후좌우를 따져 보는 비평을 모아 잡지를 시작했다. 이번 주에 탄생한 과학잡지 ‘에피’를 통해 과학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보려고 한다. 물론 과학자들에게도 과학 바깥의 어떤 문제들과 자신들의 연구가 이어져 있는지 알리려고 한다.

과학잡지 ‘에피’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