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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파고든 과학

중앙선데이 2017.09.24 01:13 550호 33면 지면보기
공감 共感
20년 전 미국의 한 의과대학 도서관에서 19세기의 과학잡지들을 한 달여 간 뒤진 적이 있다. 식수나 음식물의 오염 지표로도 사용되는 대장균이 언제 발견되었고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가 궁금했다. 내가 찾는 오래된 잡지들은 지하실에 잠들어 있었다. 최신 보고들을 중심으로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십 년, 혹은 백 년이 더 지난 잡지들을 찾는 사람들은 드물기 때문이다. 온종일 지하실의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가 밝고 산뜻한 열람실을 지나면서 철 지난 지식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과학지식 포기 불가능한 시대
줄기세포·미세먼지·알파고…
이런 문제들에 무지하다면
남의 손 안에서 흔들릴 것

과학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을 만난다. 현재를 기준 삼아 보면 틀린 이야기들이라서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들이 크게 관심 가질 이야기들은 아니다. 하지만 한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믿었던 이야기들은 과연 그럴 만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모든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거나 스스로 믿을 정도이니 얼마나 매혹적일까? 버려졌지만 매력이 넘치는 이야기들이 지하실에 숨어 있다. 물질이 연소할 때 내놓는 어떤 것에 붙여진 이름, ‘플로지스톤’. 물질이 탈 때는 무언가를 내놓지 않고 오히려 산소가 물질에 결합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이 단어의 마술에 가끔 빠진다. 지금도 왕실 도자기로 유명한 웨지우드는 플로지스톤 함량이 높은 찻잔 광고를 냈다. 개념적으로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시절에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고 믿었던 ‘에테르’. 눈에 보이지 않는 이것의 비밀스러운 작동 방식에 대한 이야기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뭐니뭐니 해도 완벽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었을 이야기는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시한 우주에 대한 설명이 아닐까? 지구에서 달까지를 지상계, 달보다 높은 곳을 천상계로 나누고 천상계에서는 완전한 원운동만 일어난다고 믿었다. 지상계에서 본질적으로 무거운 것들은 우주의 중심인 지구의 중심으로, 본질적으로 가벼운 것들은 달의 공전 면을 향해 움직인다. 아뿔사, 찌그러진 데 없는 원운동만 해야 하는 하늘에 있는 달이나 행성들이 타원 운동을 하거나 거꾸로 움직이기도 한다. 천상계에서는 완벽한 원운동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원 위에 작은 원을 그렸다. 큰 원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원을 따라 행성이 움직인다면 타원이나 역행을 설명할 수 있다. 현상을 구제하는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시대의 자원을 동원해서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그 시점의 과학이다.  
 
큰 원 위에 그린 작은 원을 주전원, 에피사이클(epicycle)이라고 부른다. 플로지스톤, 에테르 그리고 에피사이클. 최선을 다해 현상을 구제하는 설명을 해도 그것은 오류를 품고 있을 수 있고 언젠가는 다른 설명에 자리를 내어 주기도 한다. 이런 사실들은 이젠 잘 알려져 있다.  
 
30년 전 브루노 라투르가 스티브 울가와 함께 실험실에서 테크니션으로 일을 하면서 과학자들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를 만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원주민을 관찰하는 지식인의 시선이라는 비판이 인류학적인 보고에 주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 경우엔 관찰자가 아래에 서서 위에 있는 과학자들을 보았던 것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객관적이고 안정적인 지식이라고 믿었던 과학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인류학적 시선으로 보니 그것이 다른 종류의 지식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원리적으로는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졌지만 아직까지도 외부인이 과학 지식이나 그것이 만들어지는 현장에 접근하는 것은 어렵다.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이 절반이 넘는데, 보통 사람이 수학과 전문 용어로 무장한 과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겠는가? 하지만 현대인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과학 지식을 포기하기는 불가능해졌다. 과학과 기술은 너무나 철저하게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줄기세포, 가습기 살균제, 농약 계란, 미세 먼지, 기상 이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알파고와 인공지능(AI). 이런 문제들에 무지하다면 우리의 삶은 남의 손 안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과학 기술을 삶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을 역사 위에, 사회 위에, 사람의 삶 위에 놓고 맥락과 전후좌우를 따져 보는 비평을 모아 잡지를 시작했다. 이번 주에 탄생한 과학잡지 ‘에피’를 통해 과학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보려고 한다. 물론 과학자들에게도 과학 바깥의 어떤 문제들과 자신들의 연구가 이어져 있는지 알리려고 한다.
 
 
주일우
과학잡지 ‘에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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