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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고혜련의 내 사랑 웬수(11) 남편에게 길들여진다는 것

중앙일보 2017.09.20 01:03 경제 6면 지면보기
황학동 만물시장. [중앙포토]

황학동 만물시장. [중앙포토]

 
우리 집은 ‘골동품’ 전시장이다. 오래되고 귀한 것이면 나중 돈이라도 되겠지만, 그냥 낡은 것, 헌 것이라 해야 맞다. 아직은 기능상 멀쩡한 것을 그냥 버리기가 영 찜찜해서다. 

내 희노애락 지켜봤을 집안 가재도구들
오랜 세월 함께 하니 측은지심 드는데
내 인생 기록인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원래 내 것만은 아니다. 새것으로 바꾸기를 좋아하는 집안 어른이 버리려는 것이 아까워 그냥 집어오기 때문이다. 어느새 내 집안 풍경은 80대 노인, 그분의 집안처럼 탈바꿈해가고 있다.  
 
우리 집이 소장한 골동품 중에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다. 결혼 후 내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고 생각하니 마치 그 물건이 살아서 내게 말을 거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우리집 골동품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벽시계. [사진 고혜련]

우리집 골동품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벽시계. [사진 고혜련]

 
그건 납작한 벽시계다. 시계라는 게 요즘 핸드폰에도, 팔목에도 있고 집안 도처에 널려있지만 늘 거실 벽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는 그 시계. 나와 연을 맺은 후 하루도 쉬지 않고 나의 집안 내 일거수일투족을 말없이 지켜봐 왔으니 말이다. 매초 짤깍 짤깍 소리까지 내니 정말 살아 있는 것 같다.
 
사각형 나무 프레임에 유리 덮개도 없는 민얼굴을 한 채 두 개의 시침을 노출하고 있는 이 시계는 38년 전인 1980년 결혼하자마자 미국에 공부하러 가 살림을 장만하면서 사들인 물건 중의 하나다. 대부분의 살림이 갖춰진 아파트를 빌렸기에 접시 정도만 사면 그만이었다.
 
 
생명체 같은 벽시계 
 
 
골동품 가게. [사진 Stocksnap]

골동품 가게. [사진 Stocksnap]

 
그런데 가난한 유학생이 35달러짜리 그 시계를 굳이 산 것은 그 시계에 목가적 편안한 느낌을 주는 타임, 로즈마리 등이 예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발라드풍의 ‘스카보로 페어’ 가사에 나오는 그 허브 풀들이. 
 
이 시계는 우리 부부가 6년여의 미국 생활을 마칠 때 함께 동행 귀국한 유일한 물건이었다. 커버가 없으니 시계 앞면이 뭉개질까봐 따로 포장해 손에 들고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낡은 옷들과 침구류가 전부인 이삿짐을 보고 집안어른들은 혀끝을 차셨다. 당시만 해도 미국 물건하면 최고로 알려져 모두 귀국 이삿짐에 온갖 가전제품과 가구를 실어올 때였다.  
 
나는 물건을 사는데 별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냥 먹고 살만한 지금도 내 집안 물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대부분의 그릇은 혼수용으로 장만해 온 고리짝 때 것이니.  
 
 
1984년 LG전자(당시 금성사)가 처음 선보인 45L의 '금성김치냉장고'.   [사진제공=금성사]

1984년 LG전자(당시 금성사)가 처음 선보인 45L의 '금성김치냉장고'. [사진제공=금성사]

 
얼마 전 25년된 냉장고를 바꿨다. 고장도 안 난 그 냉장고를. 가전제품 매장 직원이 그걸 쓰면 절전형 요즘 냉장고 8대를 돌리는 것과 맞먹는 전기요금이 든다 해서 할 수 없이 바꿨다. 세상에! 전기요금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전기요금 누진제하에서 하마같은 그 냉장고의 역할이 컸던 모양이다. 우리 집서 유일한 새 물건이다. 
 
아 참, 티비 한 대도 새거다. 지난 추석 때인가 우리 집에 모인 친척들이 배불뚝이 고물 TV를 보며 ‘참 어지간하다’고 놀리는 듯 하자 민망해진 아들 내외가 얼마전 강제로 배달시킨 것이다. 그것들을 바꾸면서 헤어짐의 서운함을 느끼다니 이거 좀 오버하는게 아냐 하는 생각도 들었던게 사실이다. 
 
 
오래된 TV. [사진 freejpg]

오래된 TV. [사진 freejpg]

 
우리 아이가 태어날 때 들여와 그 아이와 나이가 같은 시계는 진짜 생명체인양 느껴진다. 고장 한번 안나고 가끔 베터리만 바꿔주면 씩씩하게 수 십년을 곁에 살아있는 그 시계가 끝까지 함께 해주길 바라면서 죽을 때 내가 거두어 가리라는 생각에 웃게 된다. 
 
또 그 옛날 그 값싼 물건을 그리도 튼튼하게 잘 만든 그 정직한 시계 회사 주인이 큰 부자가 되길 바라기도 한다. 함께 한 지난 세월에 의미를 부여하니 이렇게 주절주절 스토리도 만들어진다.  
 
이사할 때면 다른 귀중품과 함께 그 시계를 내 차로 먼저 옮겨놓는다. 행여 민얼굴을 다칠세라. 이렇게 말도 표정도 없는 무생물도 세월이 가면 절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서로 남남으로 만나 수 십 년을 지지고 볶으며 서로 길들여진 그 사람은 오죽 하랴.  
 
 
시인 정현종의 '방문객' 중에서. [중앙포토]

시인 정현종의 '방문객' 중에서. [중앙포토]

 
‘사람이 온다는건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오는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 하지 않는가. 수많은 사람 중 하필 내게 찾아와 닻을 내린 그 사람. 이 풍진 긴 세월, 함께 웃고 웃으며 얼굴까지 닮아가는 그와 나 사이 ‘대체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생각이 들면 오싹해지기까지 한다. 
 
세월의 잔주름이 얼굴을 덮는 요즘, 내 인생 전부의 기록인 내 짝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에게로 와서 이 세상 단 한 송이 꽃이 된 그를.
 
고혜련 (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hrko3217@hotmail.com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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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고혜련 (주)제이커뮤니케이션대표 필진

[고혜련의 내 사랑 웬수] 기자로 은퇴한 출판인. 결혼이 흔들리고 있다. 인륜지대사의 필수과목에서 요즘 들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과목으로 주저앉았다. 결혼 한 사람들은 ‘졸혼(卒婚)’과 ‘황혼 이혼’도 서슴지 않는다. 결혼은 과연 쓸 만한가, 아니면 애당초 폐기해야 할 최악의 방편인가? 한 세상 울고 웃으며 결혼의 명줄을 힘들게 지켜가는 선험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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