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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21) "잠시 마음 빼앗겼던 빨간색 트랙터"

중앙일보 2017.09.19 11:00
커피 원두가 똑 떨어져 사러 나간 길에서 골목에 우뚝 서 있는 페라리, 아니 빨간색 트랙터를 만났다. 발걸음을 딱 멈추게 할 정도로 멋있다. 내가 농사꾼이 다 되었네. 트랙터에 마음을 빼앗겨 이토록 심장이 뛰다니. 팜스프링 대저택을 빠져나오던 페라리가 저리 멋있었던가?
 
 
이렇게 새빨갛고 깔끔한 신상 트랙터는 처음 봤다. 이 트랙터도 곧 흙을 뒤집어 쓴 제 본모습으로 돌아갈테지. [사진 조민호]

이렇게 새빨갛고 깔끔한 신상 트랙터는 처음 봤다. 이 트랙터도 곧 흙을 뒤집어 쓴 제 본모습으로 돌아갈테지. [사진 조민호]

 
크기가 다른 두 대의 트랙터에 정신이 팔려 한참 앵글을 바꿔가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시골에서는 흔해 빠진 트랙터에 폭 빠져 있는 내가 주인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거다. 창문이 열리며 “어데서 오셨는데예?” 페라리 주인이 별 이상한 놈 다 본다는 듯이 묻는다.
 
“아~ 보해산 아래에 있는데요, 페라리 아니 트랙터가 하도 예뻐서 저도 하나 살까 하고요.” 짐짓 나는 농사꾼이고, 트랙터가 하나 필요하고, 마침 멋진 트랙터가 보이기에, 구매하기 전에 정보탐색 중인 척~ “이거 몇 마력이에요?” ㅋㅋ
 
내가 겨우 농사 흉내나 내는 텃밭의 크기는 아무리 넓게 쳐도 990㎡ 남짓이다. 모종 심을 날 받는 일도, 농사 용어인 ‘로타리 치는’ 일도 내 몫이 아니다. 시골생활 세달박이에게 주어지는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모종 심고(그나마 간격을 맞추지 못해서 스승님은 쏙쏙 뽑아 버린다), 풀 뽑고, 물이나 주는 건데 100마력짜리 트랙터라니. 밭에 있는 방울토마토가 비웃는 소리 들린다.
 
 
아무리 넓게 쳐야 300평 남짓한 텃밭에 100마력짜리 트랙터가 들어올 뻔 했다. [사진 조민호]

아무리 넓게 쳐야 300평 남짓한 텃밭에 100마력짜리 트랙터가 들어올 뻔 했다. [사진 조민호]

 
“공부 못하는 것들이 꼭 학기 바뀔 때마다 참고서부터 잔뜩 사고 말이야. 막귀 주제에 수 천만원짜리 오디오 샀다가 거미줄 치고, 겨우 관광 가서 마누라 사진이나 찍어주는 실력에 몇 백만 원 하는 DSLR 카메라 목에 걸고 다니다 목디스크나 걸리고 말이야. 시골생활 석 달짜리 주제에 무슨 트랙터야~~ㅋㅋㅋㅋ”
 
마음은 트랙터에 살수기를 달고 싶지만 내 손엔 비닐 호스가 들려 있고, 빨간 트랙터 위에 올라 앉아 멋있게 밭을 갈고 싶지만 역시 내 손에는 호미 한 자루 들렸다. 샀다면 트랙터 바퀴에 다 깔려 죽을 뻔한 고추며, 상추며, 방울토마토가 물을 맞으며 깔깔댄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트랙터의 페라리라는 존디어 라인업 중에 1억5000만원 하는 트랙터가 떡~ 입이 떡~)
 
지름신이 한 마디 하신다. “이놈아, 네 분수를 알아야지~ 뭐든 하려면 돈 들여 장비 장만부터 하고 보는 도시 버릇 썩 못 고칠래. 손바닥만한 밭뙈기 갈자고 앞뒤 못 가리고 지름신 호출이냐!!! 지름신, 너 아니라도 마나님들 호출에 바쁘다 바뻐~”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minozo@naver.com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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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호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필진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 퇴직은 갑자기 찾아왔다. 일이 없는 도시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이러다 죽는 날 아침에 “뭐 이렇게 빨라, 인생이?” 할 것 같았다. 경남 거창 보해산 자락, 친구가 마련해준 거처에 ‘포월침두’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평생 처음 겪는 혼자의 시간을 시작했다. 달을 품고(抱月) 북두칠성을 베고 자는(枕斗) 목가적 생활을 꿈꿨지만 다 떨쳐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도시의 취향과 입맛으로 인해 생활은 불편하고 먹거리는 가난했다. 몸을 쓰고, 글을 쓰자. 평생 머리만 쓰고 물건 파는 글을 썼으니 적게 먹어 맑은 정신으로 쓰고 싶은 글, 몸으로 쓰는 글을 쓰자, 했다. 올 3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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