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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랑스 군수 산업 살려준 숨겨진 이유

중앙일보 2017.09.18 16:57
그리스 선엔터프라이즈의 리바노스 회장은 한국 조선 산업과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고 정주영 회장이 울산 해안가의 사진과 지도, 선박의 설계도를 들고 가서 “당신이 주문하면 이곳에 조선소를 만들고 배를 건조해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제의를 그가 받아들였다는 일화는 어느덧 신화가 되었다.
 
2016년 발주한 유조선 명명식에 참석한 선엔터프라이즈의 리바노스 회장 일가. 현대중공업이 인연을 맺고 있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주요 거래처다. [사진 현대중공업]

2016년 발주한 유조선 명명식에 참석한 선엔터프라이즈의 리바노스 회장 일가. 현대중공업이 인연을 맺고 있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주요 거래처다. [사진 현대중공업]

리바노스는 처음으로 거래를 개시해 준 현대조선(현 현대중공업)이 불과 10년 후인 1983년에 세계 1위 조선사에 올라 현재까지 그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엔터프라이즈 홈페이지를 보면 현대중공업에서 건조한 제1, 2호 선박이 자신들이 주문하였다는 내용이 자랑스럽게 올라와 있다.
 
현재 가장 큰 거래처는 아니지만 선엔터프라이즈에 대한 현대중공업의 예우는 항상 깍듯하다. 사실 대기업이건 조그만 가게건, 어려울 때 처음 거래를 터 준 고객이 두고두고 고마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정반대로 우리가 갑(甲)이 되어 어려움을 겪던 외국의 기업이 일류 회사로 성장하는 기폭제가 되었던 사례가 있다.
 
대한항공이 운용했던 A300-600R. 예상하지 못한 대한항공 A300 구매는 어려움을 겪던 에어버스가 보잉과 함께 민항기 시장을 양분하는 기폭제가 됐다. [사진 wikimedia.org]

대한항공이 운용했던 A300-600R. 예상하지 못한 대한항공 A300 구매는 어려움을 겪던 에어버스가 보잉과 함께 민항기 시장을 양분하는 기폭제가 됐다. [사진 wikimedia.org]

유럽의 항공기 제작사들은 민항기 시장을 미국에 빼앗긴 뒤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 1970년 프랑스 주도로 에어버스(Airbus)사를 설립했다. A300은 그렇게 탄생한 에어버스가 처음 만든 항공기로, 1974년부터 운항을 개시했지만 참여국인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의 항공사들이 억지로 인수하다시피 한 물량을 제외하고 판매가 극도로 부진했다.
 
에어버스가 좌초될 위기에 빠지자 컨소시엄을 주도하고 가장 많은 지분을 투자한 프랑스의 고민은 컸다. 바로 이때 대한항공이 4대의 A300을 주문했는데, 이는 개발참여국 이외 최초 판매였다. 이후 대한항공이 성능에 만족하여 추가 주문까지 하자 전 세계에서 발주가 이어지면서 에어버스는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현재 보잉과 민항기 시장을 반분하고 있다.
 
당연히 에어버스에게 대한항공은 현대중공업의 선엔터프라이즈처럼  중요한 고객이다. 1990년 프랑스 정부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를 고 조중훈 회장에게 수여했을 정도다. 그런데 대한항공이 처음부터 성능이 검증 안 된 A300의 구매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의 요청으로 인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구매한 것인데,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엑조세를 발사하는 PCC-757 군산함. A300 구매와 함께 도입한 엑조세는 한국 해군이 보유했던 최초의 함대함 미사일이다. [사진 해군]

엑조세를 발사하는 PCC-757 군산함. A300 구매와 함께 도입한 엑조세는 한국 해군이 보유했던 최초의 함대함 미사일이다. [사진 해군]

국방력 강화를 고민하던 정부는 1971년 미국에 하푼(Harpoon) 대함 미사일의 판매를 요청했으나 최신 무기를 자신들보다 먼저 보유할 것을 우려한 일본의 방해로 도입이 좌절됐다. 결국 프랑스 엑조세(Exocet) 대함 미사일 구매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제 막 생산을 시작한  신무기이고 일본의 방해가 또 이어지자 프랑스가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정부는 대한항공을 내세워 A300도 함께 구매하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결국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프랑스는 엑조세와 A300을 동시 판매했다. 그 결과 정부는 국방력을 향상시키고 대한항공은 두고두고 귀한 대접을 받는 기회를 얻었다. 이때 한국의 행보에 놀란 미국이 보다 저렴한 가격에 하푼 판매를 승인하면서 국방력을 증가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었다.
 
정주영 회장이 배를 팔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바로 그 시기에 이제 갓 후진국을 벗어난 작은 나라가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세계 무기, 민항기 시장을 동시에 흔들었던 것이다.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셈이었지만 추후 해외 무기 도입에 있어서 두고두고 참고로 삼을 만한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남도현 군사 갈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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