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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의 엔딩, 추억의 드라마 '서울의 달'

중앙일보 2017.09.18 13:55
[한준희의 잡동사니 상영관]
'서울의 달'

'서울의 달'

[매거진M] 1990년대 초, 집집이 TV는 있어도 아직 비디오까진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지금으로선 믿기지도 않는 엄청난 시청률의 MBC 주말 연속극들이 있었다(최고 시청률 60%가 기본이었다!). ‘엄마의 바다’(1993) ‘아들과 딸’(1992~1993) ‘사랑이 뭐길래’(1991~1992)…. 그중 가장 명작을 하나만 꼽는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서울의 달’(1994)을 떠올릴 거다.
 
시골 청년 춘섭(최민식)은 고향 친구이자 죽마고우인 홍식(한석규)의 연락을 받고 상경한다. 취직시켜주겠다는 말에 전 재산 500만원을 들고 올라온 것. 춘섭은 서울에서의 삶과 성공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지만, 홍식은 그의 돈을 훔쳐 달아나 버린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던 서울이 이런 곳이란 말인가.
 
허나 홍식은 아직 덜 익은 어설픈 사기꾼이다. 순박하지만 끈질긴 춘섭에게 금세 꼬리가 잡히고 만다. 무릎까지 꿇고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비는 홍식. 착한 춘섭은 이걸 또 용서해준다. 어쩌겠어, 패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춘섭이 말한다. “이제부터 500만원 다 받을 때까지 너랑 먹고 자고 싸고 모든 걸 같이 할 거다.”
 
‘서울의 달’은 결코 간략한 줄거리로 요약할 수 없는 작품이다. 80부작이 넘는 대서사이기도 하지만 달동네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이웃집 군상들 각각이 조연이 아닌 ‘인생을 가진’ 캐릭터로서 사연을 품고 있다.
 
'서울의 달'

'서울의 달'

‘제비족’이면서 의외로 성실한 삶의 자세를 보이는 춤 선생(김용건)부터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변태로 오해를 사지만 누구보다 사랑의 해바라기인 미술 선생(백윤식), “내가 너 같은 놈에게 왜 사랑을 받아야 해?”라고 춘섭을 후려치는 궁상맞은 깍쟁이 영숙(채시라)까지…. 신도, 왕도, 재벌도 등장하지 않지만 인물 간의 관계도와 감정 다툼은 가히 ‘왕좌의 게임’(2011~, HBO) 이상이라 할 수 있겠다.
 
“보이즈 비 엠비셔스(Boys, be ambitious)”를 입에 달고 사는 홍식은 어떻게든 인생 한 방을 꿈꾼다. 춤 선생에게 사사받은 ‘경부선 스텝’(맞다! 그 유명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을 무기로 첫 작업에 돌입하는 홍식. 그러나 베테랑 꽃뱀을 만나 역으로 털려버리고 만다.
 
되는 일 없기는 춘섭도 마찬가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홍식과 함께 춤도 배워 보고, 흥신소에서 알바도 뛰어 보지만 영 신통치가 않다. 심지어 좋아하는 영숙 마저 친구인 홍식을 흠모한다. 홍식도 싫지 않은 눈치다. 서울 참 거지 같다, 싶다.
 
'서울의 달'

'서울의 달'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지금은 로이 킴의 달달한 목소리로 익숙한 이 곡 ‘서울 이곳은’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의 O.S.T.로 유명세를 타기 20년도 전에 ‘서울의 달’에 쓰였던 노래다.
 
가사를 곱씹어보면 왜 이 곡이 ‘서울의 달’의 메인 테마인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코믹한 터치가 많지만, ‘서울의 달’은 사실 무척 어두운 이야기다. 홍식은 약간의 주접을 거둬내면 누아르의 주인공 설정에 가까운데, 시청자들은 그가 악한임을 알면서도 응원하며 끝내 그의 성공을 바란다. 허나, 성공은 개뿔. 돈을 뜯어내려던 여자에게 “너란 인간한테 진심이란 게 있긴 하니?”라는 비아냥거림이나 듣던 홍식의 삶이 해피엔딩일 리 없다.
 
그는 원한을 산 또 다른 여자로부터 불의의 기습을 받는다. 눈발 날리는 산동네 판자촌에서 싸늘히 죽어가는 홍식. ‘춤 선생님 가다마이도 한 벌 해드려야 하고, 장가 간 미술 선생 집들이도 가야하는데…. 춘섭이한테 갚을 돈도 많이 남았는데. 이젠 다 청산하고 영숙이랑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는데.’ “영숙아, 나 지쳤어.” 한마디를 남기고 홍식은 숨을 거둔다.
 
'서울의 달'

'서울의 달'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 영숙은 홍식의 주검을 대면한다. 식어버린 홍식의 얼굴을 매만지며 입을 여는 영숙. “나는 네 진심을 알아.” 그리곤 시체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동시에 멈춤 되는 화면. 엔딩 음악과 함께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드라마가 끝났다.
 
끝난 거야? 진짜?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거야? 아홉 살짜리 꼬마였던 나의 기억 속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걸 보면 정말 파격적인 최고의 엔딩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던 건지…. 당시 MBC 드라마국엔 주말마다 홍식이를 살려내라는 전화로 업무를 못 볼 지경이었다고 한다,
 
촬영 현장에서 / 사진=중앙포토

촬영 현장에서 / 사진=중앙포토

촬영지였던 성동구 옥수동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우직한 춘섭도 ‘헛똑똑이’ 영숙도 이젠 달동네엔 살지 않겠지. 문득 재개발로 한몫씩 챙겼길 바래보지만 그럴만한 위인들도 못되는 거 같다. 그래도 어디서건 잘 먹고 잘 살고 있기를. 홍식의 마음으로.
 
 
글=한준희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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