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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퍼포머로 변신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

중앙일보 2017.09.18 11:19
'트라우마 목욕탕'의 공연 무대 서울 아현동 행화탕에 선 마임이스트 유진규씨. '트라우마를 씻어낸다'는 의미에서 옛 목욕탕에서 공연을 올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트라우마 목욕탕'의 공연 무대 서울 아현동 행화탕에 선 마임이스트 유진규씨. '트라우마를 씻어낸다'는 의미에서 옛 목욕탕에서 공연을 올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겨울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공포를 읽었어요. 웃으면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 내면에 엄청난 불안감이 어려있다는 게 보였습니다. 6ㆍ25, 4ㆍ19, 5ㆍ16, 10ㆍ26, 5ㆍ18, 6ㆍ10, 4ㆍ16 등 현대사의 갖가지 굴곡을 거치며 트라우마가 쌓인 결과지요.”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65)씨가 “트라우마 정면돌파”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환경이 좋아진다고 트라우마가 해결되지 않는다. 트라우마를 유발한 상황을 다시 맞닥뜨린 뒤 ‘이 정도는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깨달아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강조했다. 그가 18∼22일 서울 아현동 행화탕에서 공연하는 ‘트라우마 목욕탕’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트라우마와 직면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마임 작품이다. 우리 사회의 해묵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올해 초부터 작품을 구상했고, ‘트라우마를 씻어낸다’는 의미에서 폐업한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을 초연 장소로 선택했다.

"촛불 시민들 내면에서 공포와 불안감을 읽었다"
"한국전쟁에서 세월호까지 트라우마 직면하고 넘어서는 경험해야 극복"
신작 '트라우마 목욕탕' 18∼22일 행화탕서 공연

행화탕. 폐업한 목욕탕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한 곳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행화탕. 폐업한 목욕탕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한 곳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15일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그를 공연장에서 만났다. 1952년생인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전쟁의 공포를 겪었고, 스물한살에 입대한 군대에서는 폭력을 체험했다”면서 자기 삶의 트라우마부터 털어놨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약하다”고 평했다. “정치적인 상황에서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꺾이는 모습을 보고 나 역시 꺾였다”고 했다. 건국대 수의학과를 중퇴한 뒤 72년부터 마임이스트로 활동했던 그는 81년 돌연 춘천으로 내려갔다. 광주민주화운동과 신군부 정권 장악 과정을 목도하며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냥 조용히 살겠다’는 마음으로 그 뒤 7년 동안 마임도 그만두고 생계 문제만 해결하고 지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엔 트라우마를 표현한 작품이 많다. 79년 10ㆍ26 직후 공황상태에서 만든 ‘아름다운 사람’은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좌절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민초들을 그렸고,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초연한 ‘어루만지는 몸’은 몸이 물건 취급 받는 사회상을 다뤘다. 이번 신작 ‘트라우마 목욕탕’은 트라우마를 전면에 내세운다. 일례로 살아있는 개구리를 등장시키는 ‘트라우마6’ 장면에서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날카로운 가위를 끈에 묶여있는 개구리 위로 떨어뜨린다. 다행히 개구리는 가위를 피했지만, 관객들은 극심한 공포감을 느낀다. 이에 대해 그는 “‘찍히면 죽는다’를 표현한 장면이다. 관객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찍히면 죽었던’ 시절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극중 공포를 이겨내면서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온다”고 설명했다. 공연 중 예기치 못한 사건도 일어나고, 극장이라는 공간이 파괴되는 상황도 벌어진다. 각각 혼돈과 불안정이란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만드는 장치다.  
유진규의 마임 공연 '트라우마 목욕탕' 중 한 장면. 이렇게 입에 문 가위를 개구리를 향해 떨어뜨린다. 개구리는 동물적 감각으로 피하지만, 관객들은 극심한 공포감을 느낀다. [사진 아트앤에듀 프로젝트 에이]

유진규의 마임 공연 '트라우마 목욕탕' 중 한 장면. 이렇게 입에 문 가위를 개구리를 향해 떨어뜨린다. 개구리는 동물적 감각으로 피하지만, 관객들은 극심한 공포감을 느낀다. [사진 아트앤에듀 프로젝트 에이]

마임 공연 '트라우마 목욕탕' 중 '수술 트라우마' 장면. 타인에 위해 조종되는 몸으로 바뀌는 트라우마를 포현했다. [사진 아트앤에듀 프로젝트 에이]

마임 공연 '트라우마 목욕탕' 중 '수술 트라우마' 장면. 타인에 위해 조종되는 몸으로 바뀌는 트라우마를 포현했다. [사진 아트앤에듀 프로젝트 에이]

이렇게 몸짓을 통해 트라우마 치유에 나선 그에게도 아직 스스로 해결 못한 트라우마가 있다. 바로 89년 그가 만들어 2013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예술감독을 맡았던 춘천마임축제와의 석연찮은 결별이다.
문제는 2013년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손가락 욕을 했던 행위예술가 ‘오키드 레드’를 춘천마임축제에 출연시키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당시 오키드 레드가 “박 전 대통령 부부를 모독하려는 게 아니라 이들을 신격화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욕”이라고 해명했지만, 춘천시는 출연 금지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왔고 축제운영위원회는 공연을 1주일 남짓 남긴 시점에 ‘출연 불허’ 결정을 내렸다.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키드 레드는 ‘미친 금요일’에 출연하기로 돼 있었다.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19금’으로 관객 연령을 제한한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아티스트가 과거 ‘손가락 욕’을 했다는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하게 한다면 예술공연축제인 춘천마임축제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끝내 오키드 레드 출연을 밀어붙였지만 후유증은 컸다. 그는 “KBS 뉴스에 마임축제를 비판하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관객이 줄었다’‘예산 낭비 요소가 있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더라. 내가 계속 자리를 지키다가는 축제가 망가지겠다는 생각에 예술감독 직에서 내려왔다”고 말했다.  
예술감독 사퇴 이후 그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2013년말 춘천에서 문을 연 문화공간 ‘빨’은 경영난으로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가면ㆍ몸ㆍ마임’(2015), ‘왜놈대장 보거라! 우리의 자유를’(2016) 등 신작 발표를 꾸준히 하면서, 3년 전부터는 석자연 스님과 함께 중국의 ‘차회(차를 마시는 모임)’가 열리는 곳을 다니며 유랑공연도 한다.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1월부터 올 3월까지는 광화문에서 매주 토요일 시국 퍼포먼스 ‘옳’을 펼치기도 했다.
올해로 마임 데뷔 45년을 맞은 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다. 그는 “긴 호흡의 계획은 없다. 순간순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마임축제 트라우마로 생긴 변화다”라고 말했다. 다만 “오방색을 소재로 한 다섯 개의 방 시리즈 중 마지막으로 남은 ‘파란 방’은 조만간 만들 것”이라고 전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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