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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거대한 석유탱크에 담긴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 마포문화기축기지 탐방

중앙일보 2017.09.18 11:02
1번 탱크에서 바라본 6번 탱크의 모습.

1번 탱크에서 바라본 6번 탱크의 모습.

서울 마포구 증산로 87. 지난 41년 동안 이곳은 미지의 장소였습니다. 높은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인 데다, 휴대전화도 잘 터지지 않을 만큼 폐쇄돼 있었죠. 언뜻 보이는 망루와 초소들은 위압감을 줬습니다. '마포문화비축기지'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석유비축기지를 설명하는 말인데요. 지난 1일, 서울시는 이 오랜 비밀 공간을 시민들에게 개방했습니다. 소중도 방문해봤죠.
실내와 야외 공연장이 있는 2번 탱크의 외관.

실내와 야외 공연장이 있는 2번 탱크의 외관.

 
기지의 첫인상은 '낯섦'이었습니다. 드럼통 모양의 탱크들이 매봉산 중턱에 앉아 있었는데요. 건물 3~4층 높이로 그 크기는 꽤 컸습니다. 형태는 컴퍼스로 그리고 자로 잰 듯 정확한 원기둥 모양이었죠. 외벽은 녹이 슬어 군데군데 변색이 있는 구릿빛을 띠었습니다. 한때 이곳은 1급 군사 보안시설이었습니다. 1973년 석유파동(석유 공급 부족과 석유 가격 폭등으로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일)을 겪은 우리 정부는 2차 파동을 대비하기 위해 석유를 저장할 비축기지를 지었죠. 14만 제곱미터의 너른 성산동 땅에 세워진 6개 탱크에는 131만 배럴의 석유가 저장됐습니다. 이는 서울 시민들이 한 달간 생활할 수 있는 양이죠. 그러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돌연 폐쇄됐습니다. 폭발과 안전 위험이 있는 시설을 경기장 주변에 둘 수 없단 FIFA 규정 탓입니다.
 
그렇게 잠들어 있던 기지가 '건축'이란 키워드를 만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지금 서울시 전역에는 전 세계 도시 그리고 서울 건축의 역사와 흐름을 살펴보는 '2017 서울도시건축주간' 행사들이 한창인데요. 문화비축기지에서도 'Future House 2020'란 이름의 전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전시가 이뤄지고 있는 곳은 '커뮤니티센터'라는 이름이 붙여진 6번 탱크입니다. 전시 공간과 회의실·강의실 등이 설치된 공간이죠. 전시는 이곳 지하 2층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벽돌과 시멘트가 아닌 빅데이터·인공지능·로봇공학으로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Future House 2020' 전시의 한 작품인 'Vernacular Versatility'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상 속에선 한 디자인 소프트웨어의 조작 과정이 나옵니다. 이 소프트웨어는 한옥의 건축 과정을 알고리즘으로 풀어낸 후, 이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적용한 것이죠. 사용자는 이 프로그램으로 면적, 층고, 형태 등을 조작해 자신만의 한옥을 디자인해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투명한 광섬유들로 복잡하게 연결된 건축물의 모형도 만날 수 있습니다. '통합적 미디어 주택'이란 작품인데, 전기사용량과 수면시간과 식사시간 등 각종 삶의 패턴들이 표시되는 미디어 장치들이 벽과 천장, 바닥 등 집의 모든 공간에 설치됐을 때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죠.
 
전시장 옆에는 카페테리아가 있습니다. 통유리로 들어온 햇살을 가득 머금어 따뜻한 분위기였죠. 건축학도·예술학도들이 테이블 앞에 둘러 앉아 토론에 열심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1층을 향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지진 가상현실체험관. HMD(안경처럼 착용하는 영상표시장치)와 시뮬레이터로 지진 현장을 체험하고 집 안에서, 거리에서, 사무실 안에서 강진을 겪었을 때의 대처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서울_건축에 이야기를 더하다' 스토리텔링 전의 전시 패널들. 서울시는 지난 5월 8일부터 7월 10일까지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전시 출품작을 응모 받았다.

'서울_건축에 이야기를 더하다' 스토리텔링 전의 전시 패널들. 서울시는 지난 5월 8일부터 7월 10일까지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전시 출품작을 응모 받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이승관의 대표작 사진과 설계도를 볼 수 있는 '올해의 건축가' 전. '2017 서울건축문화제' 전시 중 하나로, 1번 탱크에서 이뤄진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이승관의 대표작 사진과 설계도를 볼 수 있는 '올해의 건축가' 전. '2017 서울건축문화제' 전시 중 하나로, 1번 탱크에서 이뤄진다.

'한강건축상상전_한강극장' 전이 열리고 있는 1번 탱크 전시관 모습.

'한강건축상상전_한강극장' 전이 열리고 있는 1번 탱크 전시관 모습.

왼쪽으로 돌아보면 나선형으로 휘어진 넓은 공간과 마주치게 되는 데요. 여기엔 서울 시민들의 이야기가 빼곡합니다. '서울_건축에 이야기를 더하다' 전이 열려 있기 때문이죠. 지난 5월, 서울시는 스토리텔링 작품 공모 공고를 냈습니다. '당신에게 서울이란 어떤 의미인가요?'란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에요. 참가자들은 특별한 추억이 깃든 도시 공간이나 건축물을 이야기로 풀어 서울시에 전달했는데요. 전시장에선 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뛰어난 필력으로 눈에 띄는 작품도 있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자기 생각을 담담히 풀어놓은 작품들이었죠. 자취방이자 스무살의 추억이 담긴 '경희맨션'(유동훈씨 작품), 작가로서의 꿈을 품게 한 공간인 '보안여관'(최정민씨 작품) 등이 그 예입니다. 현장에선 참가들이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텍스트를 읽을 수 있어 마음에 다가오는 것들이 보다 다채롭습니다.
 
걸어서 3분 거리의 2번 탱크로 갔습니다. 음악·연극 등의 공연장이 자리한 곳이죠. 푸른 이끼가 낀 탱크 외벽을 어루만지며 실내 공연장 옆 계단을 올랐습니다. 야외 공연장의 모습이 보였죠. 무대 뒤엔 스크린 형태의 회색 벽이 자리하고 있고, 앞엔 직육면체 모양의 콘크리트 의자가 설치돼 있습니다. 곳곳에 금이 간 흔적, 녹 슨 흔적, 자외선을 받아 변색된 흔적이 눈에 띄었죠.
2번 탱크의 야외 공연장 모습. 양옆의 매봉산과 스크린 뒤로 보이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2번 탱크의 야외 공연장 모습. 양옆의 매봉산과 스크린 뒤로 보이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40여 년이란 기지의 오랜 나이를 보여주는 흔적이지만, 이것들이 공연장 분위기를 더욱 자유롭게 했습니다. 감추거나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때문이죠. 실제로 기지 리모델링을 총괄한 박철수 서울 푸른도시국 문화비축기지 담당자는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 애썼다"고 말합니다. "기지의 존재와 이것이 가지고 있는 오랜 역사를 상암동 주민들조차 모르고 지냈어요. 이번 공개는 사람들에게 이를 알린단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고민도 있었습니다. "폐쇄돼 있던 동안 서울시 내부적으로도 기지의 활용 방안에 대해 오랜 고민을 했어요. 여태 시도해온 행사들의 성과가 썩 좋지 않았고, 기지를 고치는 데 주어진 예산과 인력도 충분치 않았죠." 이를 돌파하기 위해 마련한 방안은 결국 '사람들의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박 담당자는 "대학로·연남동 일대가 문화비축기지의 롤모델"이라고 말했는데요. "열정 넘치는 예술가들이 많은 곳들이잖아요. 최근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때문에 이곳에 있던 연습실을 잃은 예술가들이 많은데, 그분들을 우리 기지에 데려와 자유롭게 공연하게 하는 게 1차 목표입니다."
 
또 다른 목표는 시민들을 위한 예술마당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박 담당자는 "악기 하나 연주하려해도 옆집 눈치 보느라 주저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곳에서 자유롭게 배우고 연습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지의 너른 잔디 마당은 그런 의미를 품고 있기도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사람의 발길이 끊긴 장례식장, 제철소, 화력발전소 등을 공원으로 리모델링해 인기를 끈 사례가 있습니다. 미술·음악·패션 등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예술 관련 교육은 이 장소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죠. 문화비축기지와 기지가 터 잡은 성산동도 이렇게 바뀌어갈 수 있을까요? 서울 푸른도시국의 소망이 담긴 문화비축기지의 각종 프로그램들은 10월 14일 공개될 예정입니다. 현재 이뤄지고 있는 서울건축문화제 전시와 행사는 이달 24일, 서울건축비엔날라 전시와 행사는 11월 5일까지 열립니다.


글=이연경 기자 lee.yeongyeong@joongang.co.kr
사진=임익순 작가(오픈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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