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민족의 재간둥이’는 통일보다 평화라 말한다

중앙선데이 2017.09.17 01:01 549호 8면 지면보기
[정재숙의 공간탐색] 작가 황석영의 집필실
양옥의 2층 방 두 개를 터 만든 황석영 작가의 집필실. 그림 왼쪽은 서가와 손님 맞이 공간이고 오른쪽에는 컴퓨터와 각종 자료가 정리된 글 쓰는 책상이 놓였다. 안충기 기자-화가

양옥의 2층 방 두 개를 터 만든 황석영 작가의 집필실. 그림 왼쪽은 서가와 손님 맞이 공간이고 오른쪽에는 컴퓨터와 각종 자료가 정리된 글 쓰는 책상이 놓였다. 안충기 기자-화가

창작의 산실은 내밀한 처소다. 한국 문화계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작업하는지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했다.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그 생산 현장을 깊게 드러내려 사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화가인 안충기 기자는 짧은 시간 재빠른 스케치로 작가들의 아지트 풍경을 압축했다.

분단 현장의 이야기꾼 ‘구라 형님’
출옥하며 “긴 여행 끝낸 느낌”
“북한을 좀 본 지식인으로서
남·북 화합하게 힘쓸 수 있으면… ”

 
이 연재물의 열두 번째 주인공은 작가 황석영(73)이다. ‘조국의 분단을 운명이라고 체념하며 살아갈 것인가’란 질문에 문학으로 답하기 위해 그는 경계를 넘어 남과 북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등단 55년을 바라보며 그는 긴 시간 견지해 온 역사 참여의 정신으로 다시 이 땅의 평화를 말한다.
 

옥살이 후유증을 글쓰기로 극복한 그이지만 다시 책과 글 감옥에 갇힌 셈이 됐다. 안충기 기자

옥살이 후유증을 글쓰기로 극복한 그이지만 다시 책과 글 감옥에 갇힌 셈이 됐다. 안충기 기자

그는 집에서 ‘2층 남자’로 불린다. 경기도 고양시 정발산동 저동중학교 건너편 주택가에 있는 아담한 양옥이 황석영 작가의 집필실인데 아내는 1층에, 그는 2층에 주로 머물기에 붙은 별명이다.
 
그는 숫자로 불리는 데 익숙하다. 1993년 방북(訪北)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았을 때 서울구치소에서는 수인번호 ‘83’, 94년 공주교도소에서는 ‘1306’으로 불렸다. 0.8평 독방에서 번호 달고 지낸 5년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출옥하면서 그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떠났던 긴 여행을 끝낸 느낌”이라고 말했다.
 
탈출 아닌 탈출, 망명 아닌 망명으로 국내외를 떠돌았던 그는 떠나고 또 떠나는 숙명적인 떠돌이의 삶으로 분단 한국의 현장을 이야기꾼의 입심으로 증언했다. 후배들이 붙여준 별명 ‘구라 형님’은 난장판 된 이 땅 곳곳을 말 잘하는 자로서 돌파한 그의 뚝심에 대한 은유다. 파란만장 칠십여 평생을 스스로는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서 살아온’이라 표현했다. 자신의 기억이 찍은 남과 북의 풍경과 사람살이를 자유의 이름으로 재현해 온 50여 년 문학의 길은 험난했으나 값졌다.
 
“5년 징역 살면서 단식을 열아홉 번 했어요. 징벌 먹방에 갇혀 있을 때가 제일 힘들었지요. 짐승처럼 만들어서 꺾으려 하는 걸 끝내 안 지고 이겼지. 나중에 ‘학원침투 재일동포 형제간첩단 사건’으로 1971년부터 19년 옥살이를 한 서승씨를 만났더니 ‘황 형 얘기 들으니 그건 황제 징역이야’ 하더군요.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의 지옥 같던 감옥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한 거지.”
 
수천 권의 책과 책상으로 이뤄진 그의 방은 단출하지만 한국의 분단 체제를 끈질기게 추적해 온 이 특유의 긴장감으로 살아 있다. 집이 무너질까봐 여러 번 추려내 다른 곳에 보관하거나 솎아내고도 남은 자료와 책 짐 사이에 들어앉아 그는 오늘도 한반도가 돌아가는 속내를 곰곰 숙고한다.
 
“지난해 중반까지는 ‘나가서 죽자’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절망스러웠죠. 내 책이 번역돼 나온 유럽 어느 나라쯤이라면 주저앉기도 쉬울 듯했고, 오라는 곳도 있었어요. 말년 10년을 자연 좋은 데 가서 엎어져 있으면 뭣 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겨울에 광장의 촛불이 일어나고 변화가 피부로 느껴지면서 그럼 여기 살자, 했죠.”
 
이 방에서 수많은 밤을 새우다시피 해 자전(自傳) 『수인(囚人)』을 탈고하며 그는 많이 아팠다. 젊은 시절 10권짜리 장편소설 『장길산』을 비롯해 원고 수만 장을 손으로 쓰면서 손가락이 변형되고 차츰 팔을 못 쓰게 된 뒤 자주 오른쪽 어깨를 앓았다. 그 뒤로 일찌감치 전동타자기와 컴퓨터로 갈아탔음에도 징역 후유증은 몸 이곳저곳에 상처를 남겼다.
 
“『수인』의 산파 격인 문학동네 출판사의 강태형, 1차 편집자인 아내 김길화의 조언으로 6000장쯤 쓴 원고에서 2000장을 들어냈어요. 이 책은 개인의 인생이 아니라 한국 문학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강태형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는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건 늘그막에 값진 경험이었어요. 80세 넘으면 말 그대로 여생(餘生) 아니오? 철도원 3대를 다룬 큰 서사를 하나 쓰겠다는 계획만 마무리되면 북을 좀 본 지식인, 가장 북쪽에 가깝게 사는 작가로서 남과 북이 화합할 수 있게 힘쓰겠다는 것 말곤 바라는 게 없어요.”
 
그는 “이제 무서울 것 없는 황석영의 한마디는 통일보다 평화다”고 되풀이해 말했다. 핵심 지렛대는 경제와 문화인데 나라에서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때를 보고 있다고 했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같은 자잘한 얘기는 유효기간이 지났다”며 평양에 남한 대표부, 서울에 북한 대표부 같은 뭔가 더 획기적인 일이 필요하다며 북·미 수교에 앞장서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평화, 그 한마디에 모두 입을 맞추자”고도 말했다.
 
“북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나는 호위총국 요원들 조언을 잊고 ‘자유주의적인 언행’을 해버렸는데 김 주석이 재미있는지 크게 웃곤 했어요. 나를 황 동무, 황 작가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인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황 작가는 재간둥이니 일을 많이 할 거요. 그 좋은 재간을 민족을 위해 끝까지 써야 합네다’라고요.”
 
‘민족의 재간둥이’ 황 작가는 말한다. “통일보다 평화요. 나를 이 민족 살리는 소임에 쓰시오.”

 
사형수가 남긴 염주 늘 곁에
고은이 꺼낸 박카스 병엔 …
“내게 펜과 종이만 주어진다면 어디서든 두려울 게 없었다”는 황석영 작가지만 옥에서는 글 쓰는 일을 금지당했다. 그는 “정부가 내게 글을 쓰게 해주었다면 내 징역은 훨씬 견디기 쉬웠을 것”이라 회고했다. 글을 쓸 수 없다는 건 작가에게 또 다른 형벌이었을 터. 옥살이에는 대신 사람이 있었다.
 
최군은 ‘최고수’라 불리던 사형수였다. 어머니가 보리수로 직접 깎아준 염주를 차고 있었는데 사형 집행이 있던 날, “이거 가지세요. 울 어머니한테 편지나 한 장 써주세요” 했다. 황 작가는 그 염주(그림)를 책상 옆에 두고 요즘도 매만지며 자주 바라본다. 최고수가 머물다 간 한 독방 벽에는 ‘존재하는 것은 행복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면회를 온 동료 문인들이 남긴 일화도 여럿이다. 고은 시인은 교도관이 커피를 돌리자 주머니에서 박카스 병을 꺼내 잔에 붓고는 눈을 꿈쩍이며 “좋은 거니 마셔” 했다. 한 모금 했더니 코냑 향이 입안에 가득 찼다. 고 시인은 병 하나를 또 꺼내 아예 빈 잔에 가득 따라주었다. 오랜만에 독주를 마신 황 작가는 얼굴이 불콰해졌고 취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감방에 돌아가지 못했다. 짐짓 쾌활하게 ‘옥살이의 즐거움’에 대해 너스레를 떤 황 작가 덕에 오히려 옥 밖 지인들이 위로받고 나온다더라는 후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황석영
1943년 만주 장춘 생.  
 
1962년 경복고 재학 중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뒤 50여 년을 분단 한반도의 남북 현실을 그려낸 탁월한 이야기꾼.
 
197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 투쟁 현장에 뛰어들어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돼지꿈’ 등으로 민중 현실을 담아낸 이래 글쓰기와 사는 일의 일치를 추구해 왔다.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개정판이 나온 광주 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지난 6월 펴낸 자서전 『수인(囚人)』은 탁월한 증언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관련기사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