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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이청준 선생이 풀어놓은 한의 가락…한없는 변주로 겨레의 심금 울리다

중앙일보 2017.09.16 01:00 종합 25면 지면보기
책으로 읽는 뮤지컬 - 서편제
 
서편제
(이청준 전집 12)
이청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좋다, 잘한다! 추임새 좀 넣지, 어찌 그리 점잖다요?”
 
생전의 이청준(1939∼2008) 선생은 소리판에 끼어들기 쑥스러워 제대로 화답하지 못하는 우리를 안타까워했다. 1998년 봄 열림원판 전집 1차분이 나왔을 때였다. 남도를 함께 여행하면서 선생이 서울에서 당신 고향을 방문한 손님에게 소리판 선물을 준비하신 터였다. 소리꾼들이 신명을 지피는데도 우리가 계속 쭈뼛거리는 탓에 소리꾼들에게 미안하셨던 것이다.
 
이청준은 남도 소리를 무척 아꼈던 작가다. 그에게 소리는 모든 것이 어우러지고 풀리고 승화되는 어떤 경지였다. 일상에서 다친 상처를 치유케 하고 닫힌 마음을 열게 하는 예술이었다. 어쩌면 그는 ‘서편제’의 세계를 웅숭깊게 하고자 이 땅을 다녀간 작가가 아니었을까.
 
그 서편제, 그 곡진한 한의 가락에 다시 젖어 들었다. 가을이 오는 주말 2014년에 이어 3년 만에 무대에 오른 뮤지컬 ‘서편제’를 감상했다. 과연 서편제는 한국문화의 핵심 문화 콘텐트였다. 이청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의 영화, 김선두의 한국화, 뮤지컬을 비롯한 각종 공연 등으로 서편제 가락이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 이번 뮤지컬에서도 소리 길의 풍경을 통해 인생길의 그윽한 상징과 역동적 리듬을 되살렸다.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서편제’. [사진 CJ E&M]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서편제’. [사진 CJ E&M]

 
소설에서 소리꾼 아비는 소리에 대한 불안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의붓아들이 떠나자, 딸마저 도망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한이 깊어야 소리가 깊어진다는 생각으로 딸의 눈에 청강수를 넣어 눈을 멀게 만든다.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는 딸이지만 아비를 원망하는 대신 용서한다. 아비라는 타인의 세계를 넉넉히 받아들이는 용서로 딸은 영혼의 자리를 심화한다. 원한과는 다른 역동적 한의 에너지를 지니게 되고, 용서를 통해 깊어진 한은 참 소리로 승화돼 새로운 생명의 창조로 이어진다. 그 결과 깊은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 눈뜬 사람은 볼 수 없는 비상학(飛上鶴)을 보게 된다. 아픔과 상처를 껴안고 삭이면서 걸판진 흥과 신명기로, 타인과 세상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주면서 겨레의 소리 길을 웅숭깊게 빚어낸다.
 
요컨대 이청준의 ‘서편제’는 겨레의 한의 심상과 한의 언어, 그 한 살이가 승화된 한 극점으로서 판소리 세계를 통해 창조적인 생명의 미학의 가능성을 탐색한 복합적인 한의 문학 공간이다. ‘서편제’에서 한은 창조이며, 그 이상이다. 한의 바깥은 없다. 계속 다채로운 문화콘텐트로 겨레의 심금을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가을 뮤지컬 관객이 추임새를 대신해 기립박수로 화답한 것도 그렇다.
 
우찬제 서강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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