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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의 寫眞萬事]어느 진보주의자와의 대화

중앙일보 2017.09.16 00:10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민중당 당원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민중당 당원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15일 아침 북한은 비행거리 3700km에 달하는 탄도미사일을 동해와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넘어 북태평양으로 날려 보냈다. 늘 그랬듯이, 아무런 사전 예고 없는 도발이다. 지난 3일 6차 핵실험을 강행한 이후 12일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결의안이 채택된 지 불과 3일 만에,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14일 정부가 국제기구를 통해 800만 달러 규모의 대북 인도지원을 검토한다고 발표한 지 하루 만에, 전 세계를 상대로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핵 개발 완성과 핵을 실어 나를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소식이 알려진 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이런 상황에서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며 “북한의 도발을 좌시하지 않고 북한을 변화시킬 단호하고 실효적인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의 도발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정부의 대응도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한쪽은 핵과 미사일로 힘을 과시하고 그럴 때마다 한쪽은 말로 철저한 대응을 강조한다.
 
15일 아침 광화문을 지나다가 미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중년의 남성이다. 어떤 때는 젊은이가, 어떤 때는 앳되어 보이는 여성이 이 자리에서 시위를 한다.
  
-오늘 아침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아십니까?
“압니다”
-3일에는 핵실험도 했고요
“압니다”
-그런데도 이 시위판의 구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이런 주장을 하려면 최소한 북한 김정은의 핵실험을 규탄하는 구호도 같이 있어야 설득력이 있을 것 같은데...
“.........”
-진보주의자라면 전쟁을 반대하고 핵에 반대하는 반전반핵이 기본이잖아요. 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세요? 더구나 북한의 핵폭탄은 남한 주민을 겨냥하고 있는데”
“그건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그리고 핵으로 치자면 미국은 더 많은 핵폭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핵은 중국도 있고 러시아도 있는데 왜 하필 미국 대사관 앞에서만 시위를 합니까?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람이 없어서 여러 곳에서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핵 보유국마다 돌아가면서 하지 왜 콕 찍어 미국대사관에서만 합니까?
“자리 좀 비키세요. 구호가 가리잖아요”
-그럴게요. 그런데,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도 날리는데 사드마저 없으면 무엇으로 북한의 핵미사일을 막나요?
“그러니까 대화를 해야죠”
-북한은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핵을 만들었어요. 첫 핵실험은 2006년입니다. 핵 폭탄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북한은 대화를 하는 척 하면서 뒤로 핵폭탄을 만들었어요. 상황이 이런데도 대화로 문제를 풀자구요?  
 
중년의 민중당원 다음으로 1인 시위를 교대한 청년.시위는 당원들이 교대로 한다.

중년의 민중당원 다음으로 1인 시위를 교대한 청년.시위는 당원들이 교대로 한다.

  중년의 사내는 이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일은 막아야 한다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서 북한의 핵을 동결하고 북미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물었다.
-지금 북한의 핵을 있는 그대로 동결하고 북미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요? 주한미군은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철수해야지요”
 
  어떤 여성이 다가와 중년의 사내에게 말을 붙이면서 대화는 끝이 났다. 길 건너 미국 대사관의 담장에서 불과 5m도 안되는 지점에 똑같은 구호를적은 피켓을 든 교대자가 나타나 중년의 사내가 있던 자리로 가라는 경찰과 말싸움을 시작했다. 전투력이 강한 청년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300일이 넘게 시위를 했다. 당신들이 뭔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거냐”며 자리를 옮겨달라는 경찰의 요구를 비웃었다.  
이들은 모두 민중당의 당원이다. 1일 24시간 내내 교대로 매일 1인 시위를 이어간다.    
10여 m 길 건너로 시위 장소를 옮겨 달라는 경찰과 말싸음을 하고 있는 청년.전투력이 대단했다.

10여 m 길 건너로 시위 장소를 옮겨 달라는 경찰과 말싸음을 하고 있는 청년.전투력이 대단했다.

 
  사드는 북한 도발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시간적으로만 봐도 분명히 그렇다. 그럼에도 일부 진보 진영은 북한 핵과 미사일 도발은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그 결과인 사드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한다.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국적이 같을 뿐, 단어의 의미나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벌어졌다. 모두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누구에게 평화는 최종 목적이고 누구에게 평화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중년의 사내와, 경찰과 시비를 벌이는 청년을 보면서 나는 그들과 나 사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벽을 보았다. 그들도 나를 보며 숨이 막혔을지 모른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시간이 이상한 방식으로 축적되고, 그 이상한 축적물들이 썩어서 흘러나오는 오수가 이 땅에 스며들면, 전쟁도 국가간 대화라고 주장하는 대범한 전쟁주의자들이 설쳐댈 때가 올지도 모른다. 
예고를 하면서 다가오는 위기는 위기가 아니다. 동족 간에 총부리를 겨누는 것도 모자라 머리에 핵을 이고 살게 된 오늘의 현실은 눈앞의 위기를 일부러 외면하고 귓등으로 흘린 우리 모두의 어리석음이 마침내 치러야 할 대가다. 위기가 민족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벼랑끝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끼리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김춘식 중앙일보 포토데스크 부국장 kim.choonsi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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